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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냥 Oct 02. 2020

네 모습 그대로

판단당하기는 싫지만 판단하는 것은 너무도 쉬운 우리, 작은 어른들



한 친구가 언제든 자신에게 고민을 털어놔도 된다고 말하기에 주저하다가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아, 그런 상황에서는~” 그런데 그 친구는 아직 말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조언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심지어 자기도 그런 상황을 겪어봤고 잘 이겨내 보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이해한다며 위로의 말을 건네기까지 했다. '지금 내가 무슨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거지...?' 친구의 말이 의도한 바와 다르게 점점 산으로 가자, 내가 하려던 말은 그것이 아니었다고 다급하게 가로막았다. 그 친구는 잠시 동안은 다시 경청하는 듯 보였지만 얼마 있지 않아 처음처럼 말을 자르고 자신만의 조언을 이어갔다. 몇 번을 반복하니 마치 이미 짜인 판에 덩그러니 놓인 말이 된 기분이 들었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보며 내린 판단이 진정한 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이후로, 누군가 마음대로 나를 판단하려 들면 불쾌했다. 내가 말하는 나와 상황이 아닌, 상대가 보는 상황과 나에 대해 초점을 맞추는 그 행위가 나를 왜곡하는 기분이 들었다. 조언을 이어가는 친구를 보면서 그 생각은 더욱 짙어졌다. 그 친구는 왜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던 것일까? 조언을 듣는 대상에게 초점을 맞춘 것일까, 아니면 조언하고 있는 위치에 서있던 자신에게 집중한 것일까.


하루는 집안의 어른들과 다 함께 TV를 보고 있었다. 그전에는 몰랐는데, 인식하고 나니 자꾸만 불편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채널을 돌릴 때마다 어른들은 전혀 친분이 없는 TV 속의 사람들을 판단하고 평가하기 급급하다는 것이었다. “쟤? 쟤는 왜 뜬 거야?”, “저런 프로에 나오는 사람들은 무식해.” 이뿐만이 아니었다. TV를 끄고 대화를 시작하자 평가와 판단은 더욱 난무했다. 어른들은 누가 어느 대학에 가고, 누가 결혼을 아직까지 못했는지, 누가 어떤 직장에 들어갔는지 이야기하며 그것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기 바빴다. 집중해서 듣다 보니 정말 그 친척에게 애정이 있어서 궁금한 것인지, 상대를 판단하는 위치에 서는 것이 좋아서인지 의문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의 판단만이 정답이 아님을 깨달은 작은 어른. 그는 자신의 발목을 옭아매고 있는 시선이라는 자물쇠를 끊어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누군가 자신의 한계를 정하면 그것에 좌절하기보다는 가능성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려 애썼다. 타인의 판단에 좌우되지 않기 위해 매일 같이 거울을 보고 “나는 누군가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라는 말을 되뇌었다. 


작은 어른은 자신의 모습을 잃지 않기 위해 매 순간 생각하는 힘을 길렀다. 이런 노력을 통해 그의 다리를 무겁게 만들었던 자물쇠는 하루하루 조금씩 가벼워져갔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그 자물쇠는 특정 무게 이상 가벼워지지 않았다. 머리를 싸매 보아도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여느 때처럼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 그는 기분 전환을 위해 친구들과 소풍을 가기로 했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과 이야기 꽃을 피울 생각에 설렌 작은 어른은 도시락을 싸들고 빠르게 걸었다. 약속 장소에 다다르니 그는 자신이 가장 늦게 도착했음을 깨달았다. 이미 모여있던 친구들은 한 친구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있었다. 작은 어른은 슬쩍 다가가 자연스럽게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대화의 주제는 한 친구가 구름을 만들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작은 어른은 의문이 들었다. 


‘구름을 만들어? 일에나 집중하지 무슨 구름이람. 아니 그것보다 구름을 만들어서 뭐하려고 그러지? 어휴. 해맑은 저 표정 좀 봐. 저 친구 아직 철이 덜 들었네...’


그는 친구에게 걱정스러움이 묻어나는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근데 친구야, 구름을 만들 수 있어? 그거 만들어서 뭐하게. 네 일에 더 집중해야 하지 않아?”


그러자 주변의 친구들도 그 말에 수긍한다는 듯 너도나도 말을 얹어갔다.

“맞아, 무슨 구름을 만들어. 차라리 그 시간에 일을 더 해서 돈을 벌자.”


 “그러게나 말이야. 쓸데없는 일에 시간 버리면 나중에 후회한다 친구야?”


 “다 네가 걱정돼서 그런 거야.”


그들의 말에 구름을 만든다던 친구는 멋쩍게 웃기만 할 뿐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그러다 이내 자리가 불편했는지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친구들은 떠난 친구의 뒷이야기를 하느라 작은 입들을 동동 띄운 채 바쁘게 움직여대고 있었다. 그때 작은 어른은 친구가 떠난 자리에 무언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낡은 수첩이었다. 그가 손을 뻗자 순간적으로 거센 바람이 불어 수첩이 펼쳐졌다. 




작은 어른이 수첩을 쳐다보자 그 수첩은 마치 자신 안에 담긴 내용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바람에 따라 한 장씩, 한 장씩 넘겨졌다. 그 안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적어온 것처럼 보이는 계획들이 담겨있었다. 구름을 만드는 기계에 대한 내용이었다. 작은 어른은 정성스럽게 적힌 그 기록들을 보며 정체를 알 수 없는 불편한 마음을 느꼈다. 그 이상한 마음은 친구에게 수첩을 돌려주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얼마 후, 그는 친구와 따로 약속을 잡고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수첩을 건네주며 자연스럽게 그 내용에 대해 물어볼 수 있었다. 기쁨에 차 자신의 오랜 계획을 이야기하는 친구를 보니 불현듯 작은 어른의 마음속에 그 불편한 마음의 이름이 떠올랐다.


‘질투 섞인 실망감’


자꾸만 뜨거워지는 햇빛 탓에 힘들어하는 친구들을 보며 구름을 만드는 법을 틈틈이 공부해왔다는 그 친구. 그는 반짝이는 눈을 하고 자신의 계획들을 하나씩 설명했다. 그의 손에 들린 수첩도 주인의 진심에 덩달아 신이 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친구의 마음을 이제야 알게 된 작은 어른은 그를 멋대로 판단해 작게 보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에 실망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과 다르게 튀는 삶을 살고자 했던 친구에게 은연중에 질투심을 느꼈던 스스로를 발견했다. 작은 어른답지 못한 친구의 모습을, 모두와 같은 작은 어른으로 다시 돌려놓고 싶은 마음이었다.


타인에게만 있다고 여겼던 작은 어른의 습성이 자신에게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음을 느낀 그는 적잖은 충격에 빠졌다. 그는 자신이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자격 없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나도 사람들을 작은 어른으로 만들고 있었구나.’


그가 이 깨달음을 얻자 더 이상 가벼워지지 않던 발목의 자물쇠가 탁! 하고 풀려버렸다. 화들짝 놀라 자물쇠로 향해 있던 그의 시선은 이내 홀린 듯 앞에 앉아 있던 친구에게로 옮겨졌다. 작아 보이기만 했던 친구는 이전보다 더 커져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제야 원래의 크기대로 볼 수 있었다. 작은 어른은 그를 제한해서 보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무더운 여름이 찾아왔다. 그해 여름은 무척이나 덥고 뜨거웠다. 오랜 시간 비도 오지 않아 사람들은 모두 지쳐있었다. 작은 어른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작은 어른의 집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친구야, 나야. 요즘 많이 덥고 힘들지내가 만든 구름 기계! 그걸로 너희 집에 구름을 보내줄게. 조금이라도  시원하게 보냈으면 좋겠어."


친구의 따스한 정성에 작은 어른은 아주 더웠던 그 해 여름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판단당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개인주의가 퍼져나가면서 한 사람의 의사와 개성의 중요성이 강조되며 그 분위기는 더욱 명확해졌다. 그런데 옥죄는 시선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작은 어른들이 양성되고 있다. 왜 그런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시선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고 말한다.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가 이래서,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그래서 나의 이름을 잃어버렸다고 여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 영향이 전혀 없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 남들 하는 대로 살아오며 작은 어른이 된 우리도, 작은 어른으로서의 습성을 가지고 산다. 그 습성 중 가장 무서운 부분이 바로 타인에 대한 자격 없는 판단이다.




이 모순을 깨달았다면 판단하는 시선 대신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할 단계에 서있다고 볼 수 있다. 타인이 내 상황을 모두 알 수 없듯이, 나 또한 타인의 상황을 모두 알 수 없다. 일부 정보만을 보고, 전부를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말로 상대를 위한다면 내 머릿속에서 정의하고 상상해낸 타인이 아닌, 상대방이 말하는 그의 모습을 보려고 애써야 한다. 그 모습에 관심을 가지고 그 입장에서 함께 해주어야 한다. 상대를 위하는 마음보다 내가 하는 생각에 더 초점을 맞추면 이 과정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건 소통이 아니라 나와 내 생각이 대화를 주고받는 독백과 다름없다.


독백이 진정한 대화로 바뀌려면 '내 모습 이대로' 뿐만이 아니라 '네 모습 그대로'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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