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이름을 잃게 만드는 타인의 시선
최대 몸길이 4.5m, 무게 1.5t까지 클 수 있는 북극의 하얀 고래 벨루가. 인간에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벨루가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 SNS에 퍼지면서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영상을 본 사람들 중 일부는 이 존재를 실제로 보기 위해 여러 수족관을 검색하기도 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들뜬 마음으로 그 해 여름, 벨루가가 있다는 수족관에 방문했다. 그곳에서 만난 하얀 고래는 드넓은 바다를 누비며 살았던 DNA를 뽐내기라도 하듯 빠르게 헤엄치고 있었다. 자유로워 보였다.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니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그 아이는 필사적으로 빙글빙글 도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단순히 수영하는 것이 좋았던 것일까? 아니면 무엇에 쫓기던 것일까...? 의문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와 일상을 살아가던 도중, 기사를 통해 그 고래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OO아쿠아리움 벨루가, 폐사.”
아마 당시의 이상 행동은 마음의 병을 표출하려던 몸부림이었던 것 같다. 자유롭게 바닷속을 항해했어야 할 커다란 고래. 그런 생물이 수조에 갇혀 눈이 앞에 달린 희한한 생명체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내야 했으니,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을 터. 심지어 벨루가가 내뿜는 초음파는 콘크리트를 뚫지 못한다고 한다.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초음파들은 그 아이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평균 30-35년 최장 50년까지도 살 수 있다는 북극의 하얀 고래는 그렇게 한국이라는 낯선 곳에서 12년의 짧은 생을 마쳤다.
큰 존재를 마음대로 작은 공간에 가둬두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가 한참을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그 존재를 그렇게 만든 인간이란 종족도 별반 다르지 않은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도 “타인의 시선이라는 수조”에 갇혀 살고 있지 않은가. 그 안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며 마음의 병을 얻지만 그 누구도 탈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 공격적인 시선은 나를 나답지 못하게 만들어 스스로가 누구인지 잊어버리게 했다. 이름을 잃은 우리는 그렇게 작은 어른으로 자라났다.
“나는 누구지?”
작은 어른은 이름을 되찾고 싶어 졌다. 이름을 찾게 되면 현실의 답답함이 해소될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써도 답답함이 씻겨 내려가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현실에 치여 ‘나’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지금껏 나에게 온전히 집중해보았던 기억이 없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그는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지만 우선 마음을 다잡고 지나온 과거에 집중해보기로 했다. 과거가 쌓여 현재의 자신이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커다란 아이 시절, 이름의 윤곽을 서서히 찾아가고 있었다. 스스로가 누구인지 탐색하며 자아를 인식하고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만의 기준이 없었다. 저마다의 기준을 만들 수 있도록 열린 마음으로 도와주었어야 할 주변의 작은 어른들은 제한된 시각으로 아이를 대했다. 아이는 확신이 없었기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이 하는 말만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는 겉모습을 보고 자신을 판단하는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아이는 알지 못하였다. 그들이 볼 수 있는 부분은 사람이라는 상자의 '겉모습'뿐이라는 것을.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닿은 것은 상자를 포장한 종이와 리본 끈뿐이었다. 아이도 어느 순간부터 주변 이들이 집중하는 ‘상자의 포장’에만 관심을 가졌다. 초라해 보이지 않는 것, 너무 눈에 띄어서 미움을 사지 않는 것에 집중했다. 그 시각, 상자 안에서 조용히 잠자고 있는 가능성이라는 어마어마한 선물은 점점 잊혀갔다.
작은 어른은 회상을 마치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들이 보는 내가 진정한 내 모습일까? 왜 의심하지 않았지? 나는 나를 어떻게 생각해왔지?’
그는 오랜 시간 주저앉아 있어 힘이 약해진 두 다리를 바들바들 떨며 일어났다. 그리곤 주변의 작은 어른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얘들아, 나 내 이름을 찾을 거야. 그리고 내 가능성을 믿어볼 거야.”
돌아온 대답은 짧았다.
작은 어른은 휘청거렸지만 다시 중심을 잡고 말했다.
“나, 이런 삶은 너무 힘들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거야.”
주변의 작은 어른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 심취해 말했다.
작은 어른은 또다시 휘청거렸지만 한 번 더 말을 이어갔다.
“너도 같이 이름을 찾아보지 않을래? 우리 그런 세상을 만들어보자.”
주변의 작은 어른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작은 어른은 두 다리에 점점 힘이 빠져가는 것을 느꼈지만 마지막 힘을 쥐어짜 말했다.
“나는 나답게 살고 싶어. 내가 누구인지 설득하고 이해시키며 살고 싶지 않아.”
주변의 작은 어른은 혀를 차며 말했다.
작은 어른은 다시 주저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숨을 쉬기 어려웠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들로 가득한 이 공간에서 벗어나야 제대로 숨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꽤 가까운 곳에 위치한 뒷동산 하나가 보였다. 아무도 없는 그곳에 가면 답답함이 녹아내릴 수 있으리라 여긴 그는 그곳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힘이 빠진 두 다리를 다시 일으켜 세운 작은 어른은 온 힘을 다해 뒷동산으로 향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곳, 힘겹게 정상에 오른 그는 숨을 고르며 한참 동안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있었다.
눈을 감고 있던 그의 귀에 어느 순간부터 작은 소리들이 들렸다. 바람을 타고 온, 작은 어른들의 소리였다. 그는 눈을 떠 세상을 바라보았다. 산 아래 세상에서는 똑같이 생긴 이들끼리 끊임없이 서로를 판단하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서로 닮아있는 그들. 그런 이들끼리 판단을 내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참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때 바람을 타고 하늘을 맴돌던 작은 목소리들이 점점 커지며 작은 어른에게 닿았다. 작은 어른을 끈질기게 쫓아다니던 소리들이었다.
“실수? 너 이런 애 아니었잖아. 왜 이래?”
“넌 착한 사람이니까. 이해해줄 거지?”
오랫동안 작은 어른을 따라다니며 짓누르던 타인의 시선들이 바람에 실려 그를 간지럽혔다. 멀리 떨어진 뒷동산까지 쫓아온 시선들이었지만 그는 더 이상 형체 없는 그것들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다. 느껴지긴 했지만 그것이 작은 어른의 단단한 피부를 뚫을 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작은 어른들이 보낸 시선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그 바람은 돌풍이 아닌 산들바람으로 바뀌어있었다. 그는 깨달았다.
‘시선은 바람과 같구나.’
우리는 수조 속의 고래처럼 스스로를 타인의 시선에 맞춰 제한하곤 한다. 고래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바다에 돌아갈 수 없지만 인간은 다르다. 우리에겐 타인에 의해 갇힌 수조에서 탈출할 힘이 있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타인과 섞여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그들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 잣대로 인해 나 자신까지도 나를 제한한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닌가.
타인은 나라는 상자 안에 담긴 내용물을 알지 못한다. 그것이 얼마나 자라날지,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열어보고 확인해보기 전까지는 나조차도 알 수 없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의 시선은 저마다의 상자 속에 있는 다채로운 가능성을 제한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의 짧은 경험, 얕은 지식으로 저마다의 렌즈를 만들어 바라본다. 결국은 일부만을 볼 수 있는 렌즈인 것이다. 겉 포장지에 불과한 일부만을 볼 수 있는 렌즈라면 그 렌즈를 통해 보내는 시선들로 내 전부를 표현할 수는 없는 법이다.
시선은 바람과 비슷하다. 바람이 불고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인해 상처가 나지는 않는다. 타인의 판단들로 누군가 내 근처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느낄 수는 있지만 그들이 보내는 시선이 나에게 상처를 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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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단단한 피부를 가진 어른이다.
바람은 당신을 아프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