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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냥 Sep 12. 2020

작은 어른들의 세계로

옛날 옛날 별빛에서 태어난 존재가 있었습니다.

새벽하늘을 올려다본 적이 있는가? 답답한 마음에 새벽 다섯 시쯤 집 밖으로 나가본 적이 있었다. 도시에서는 별이 보이지 않는다는 편견을 깨부수듯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음에 없던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았다. 여유롭게 하늘을 감상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늘의 관점에서 본다면, 작은 아이가 꿈과 사랑을 가득 머금어 커다래진 어른이 되는 그 일련의 과정들이 별빛처럼 보이지 않을까. 그리고 그 빛을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한 편의 드라마가 있을 것 같았다.


한참 하늘을 보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 잠이 들었다. 단잠도 잠시, 나가야 하는 시간이 되어 평소처럼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휴대폰을 보다가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잠시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빛은커녕 색깔조차 없는 표정으로 휴대폰만 바라보고 있는 어른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시선을 급하게 내리자 휴대폰 화면에 비친 내 얼굴이 보였다. 그들과 똑같은 표정이었다. 빛을 내고 있는 어른이 없는 이곳은 작은 어른들의 세상이었다.





작은 어른의 세상이 오기 전 이야기 : 별빛을 머금은 존재


옛날 옛적 세상의 중심에 작은 동산이 있었다. 동산의 한가운데에는 연녹색의 잎사귀를 가진 작은 나무 한 그루가 살았다. 나무는 매일 같은 곳에 오도카니 서서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는 새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바람을 느끼는 일을 가장 좋아했다. 작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며 바라보는 낮의 하늘은 언제나 먼지 한 점 없이 맑고 깨끗했다. 그런 하늘을 배경으로 작은 새들이 나무의 근처를 지저귀며 맴돌았다. 나무는 이 모습을 사랑했다.


푸른 하늘에  익은 단감 빛깔이 서서히 뿌려지고 나면 적막한 밤이 찾아왔다. 밤의 하늘은 새까맣고 고요했다. 나무는 칠흑같이 어두운 하늘을 보며  어둠을 밝게 채우고 싶었다. 그날 이후 작은 나무는 매일매일 아침 이슬을 모았다. 그리고 밤만 되면 잎사귀를 털어 하늘을 향해 뿌렸다. 이슬들은 그대로 새까만 밤하늘에 콕콕 박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는  모습을 사랑했다.


나무는 반짝이는 그것들을 보며 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밤이 찾아올 때마다 반가운 마음에 노래를 불러주었다. 별들은 노래에 실려 날아온 나무의 숨결에 반응하며 더욱 반짝였다. 작은 나무의 연한 녹색 잎사귀가 조금 더 짙은 빛깔을 나타낼 때 즈음, 몇몇의 별들은 더욱 짙은 빛을 내며 나무 주위로 내려와 말을 걸기 시작했다. 이제 작은 나무 곁에는 낮이나, 밤이나 그가 사랑하는 것들로 가득했다.



매일같이 찾아와 나무 주위에서 방글방글 웃어대던 별들은 어느 순간부터 작은 나무가 있는 땅에서 살고 싶어 했다. 그들은 땅에서 하고 싶은 일들을 이야기하며 잔뜩 꿈에 부풀었다.


"나는 저기 저 동물들처럼 이 흙을 밟으며 느껴보고 싶어."

"나는 내 마음을 담아 나무를 꼬옥 안아줄 거야."


모두가 저마다의 드라마 한 편을 품고 있었다. 별일 아닌 소원처럼 치부해버릴 수도 있었지만 작은 나무는 자신이 사랑하는 별들이 꿈을 이루어 더욱 행복하게 지내길 바랐다. 나무는 그날의 기억을 마음 한 구석에 조심스레 넣어두었다. 시간이 흘러 짙어진 잎사귀가 완연한 초록빛을 보이던 그날, 이제는 작지 않은 나무가 아침 이슬과 흙을 섞어 별빛이 들어갈 수 있는 몸을 만들어 주었다.


그날 이후, 밝은 빛에서 생명이 태어났다. 작은 생명은 자라나 작은 아이들이 되었다. 이 땅을 마음껏 활보할 수 있게 된 그들은 소원을 이뤄준 나무에게 고마워하며 그를 대신해 동산을 돌봤다. 나무 열매를 저 멀리까지 퍼뜨려 작은 나무들을 기르는가 하면 작은 새들이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도록 보호했다. 별빛을 가득 머금은 그 아이들은 동산을 사랑하고 서로를 아끼며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았다. 동산은 더 이상 작지 않았다. 울창한 숲과 동물들 그리고 빛나는 아이들이 있었다. 동산 중앙의 커다란 나무는 그들을 여전히 사랑했다.


사랑을 받고 자라난 작은 아이들은 커다란 어른이 되었다. 그들이 가졌던 그 빛도 더욱 밝고 커다래졌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았던 평화로움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동산이 커질수록, 어른들이 많아질수록 그들은 더 이상 커다란 나무에게 고마워하지 않았다.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행복해할 줄 알던 그들은 서로가 가진 것에 눈길을 주며 비교하기 바빴다. 커다란 동산에 더 이상 커다란 어른은 없었다. 그들은 더 이상 빛나지도, 꿈을 품지도 않았다. 그곳에는 작은 어른들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작은 어른의 세상 속으로


작은 어른의 세상이 된 이곳에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는 애정 어린 스포트라이트를 한껏 받으며 성장해나갔다. 보호자의 손길에 의지해 배를 채우고, 자장가에 의지해 잠을 청하던 아이는 점점 자라나 걸음마를 익혔다. 그것은 '할 수 있다는 의지'보다는 '본능'에 가까운 몸부림이었다. 아이는 의심하지 않았다. 확신에 차서 그저 일어섰다. 막을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아이는 세상의 중심이 되어 인생이라는 무대 위의 주인공으로 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뿌듯함 가득한 눈동자에서 사랑을 느껴가며 더 자라난 아이는 흰 도화지에 밑그림을 그리듯 언어를 배웠다. 의사 표현을 할 수 있게 된 아이는 이를 통해 좋고 싫음을 명확히 해나갔다. 개성이 생긴 아이를 바라보는 애정 어린 눈동자에는 작은 행동 하나하나도 소중히 여기는 사랑이 묻어 있었다. 이때까지도 작은 아이는 그 눈빛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전히 무대 위의 주인공, 드라마의 주연으로 살았다.


아이는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믿으며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칭찬을 받으면 8절짜리 작은 스케치북에 화가로 빙의한 듯 멋들어진 작품을 완성시켰고, 축구공이 보이면 푸른 필드를 누비는 공격수에 이입하여 설렘으로 부풀었다. 이루고 싶은 일들이 많아진 작은 아이는 점점 커다란 아이로 자라났다. 몸과 함께 꿈을 담은 마음도 점점 커져갔다. 여전히 아이였지만 내일에 대한 기대와 앞으로 이루어갈 여러 편의 꿈을 꾸며 커다란 아이가 되었다.


아이는 학교에 들어갔고 조금 더 넓은 세상의 맛을 보았다. 그 세상에는 친구가 존재했다. 마음을 나눌 누군가가 생겨서 기뻤던 아이는 친구들과 함께 꿈을 꾸었다.


"나는 우리 엄마 이빨 안 아프게 치과 의사가 될 거야."

"그럼 나는 대통령이 돼서 병원을 차려줄게!"


사람의 이빨을 치아라고 부른다는 것도, 대통령이 된다고 해서 모든 부탁을 들어줄 수는 없다는 사실도 모르던 커다란 아이들은 천진난만한 기대에 부풀곤 했다.



시간이 흘러 더 넓은 세상으로 가게 된 커다란 아이는 쓰라린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순수하게 마음을 나누던 주변 친구들은 비교의 대상이 되었고, 존재 자체로 귀히 여겨주던 보호자는 아이의 개성보다 주변의 시선을 더욱 의식했다. 이때쯤 커다란 아이는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겉모습은 여전했지만 숫자로 평가당하기 시작한 아이의 마음에는 금이 가버렸다. 작은 실금을 제때 보수해주지 않자, 마음을 지지해주고 있던 기둥은 무너지고 말았다.


'내 가치는 누군가 결정해주는 거구나.'


꿈 많고 웃음 많던 커다란 아이의 마음에는 작은 구멍마저 생겨버려 점점 홀쭉해져 갔다. 주변을 돌아보니 뛰어난 경쟁자들이 너무도 많았다. 동그란 미소를 가졌던 커다란 아이는 웃음을 잃어버린 작고 홀쭉한 아이가 되어갔다. '높은 숫자'라는 보증서가 없는 아이는 하는 수 없이 자신만의 무대에서 내려와 작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공부에 매달렸다. 그들이 말했다.


"쓸데없는 짓하지 말고 우리 말에 따르렴. 다 널 위해서야."


아이는 왜 연필을 잡고 있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어른인 그들의 말을 따르면 다시 무대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아이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갔을 때 깨달았다.



'나는 특별하지 않구나.'


그렇게 아이는 작은 어른이 되었다. 커다란 아이가 작은 어른으로 자라났다. 받아쓰기 100점, 어른들의 칭찬만 있다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을 줄 알았던 아이는 포기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개성을 죽이고 모두가 같은 곳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겨야 했다. 주변 사람들이 특별하다고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쓸모 없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오랜 시간 무대 뒤에서 방치되며 힘을 잃어버린 다리는 일어설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작지만 포기를 몰랐던 아기 시절, 일어설 수 있다는 본능으로 의심 없이 걸음마를 익혔던 그 기억은 아득한 과거로 사라져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이 된 아이는 한줄기 기대를 품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작은 어른들뿐이었다.


'아, 원래 어른은 작은가 보다.'


그렇게 작은 어른은 수긍했고, 마음마저 작아져버렸다.





존재 자체로 귀하게 여김 받아 마땅한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상황에 따라, 결과에 따라 스스로의 가치를 정해왔다. 사회에서 정한 기준에 따라 끊임없이 평가당하고, 나도 모르게 똑같은 기준으로 타인을 평가했다. 저마다 가지고 있던 주관과 개성은 점점 희미해져서 타인의 눈치를 보는 건 당연한 일이 되었다.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내가 나인 이유를 세상에 소리쳐 설명해야 했다. 모두가 지친 얼굴을 하고 있는 작은 어른들의 세상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존재로서 빛나고, 존재로서 사랑스러웠던 그들은 저마다의 고유한 별빛을 잃어버린 돌이 되었다. 자신들이 별이었다는 사실을 새까맣게 잊은 채.


그때, 작은 어른들이 가득한 그 세상에서 작고 작은 누군가가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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