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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냥 Sep 28. 2020

내 모습 이대로

나를 알아가는 첫걸음,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친구가 대뜸 “너는 뭘 좋아해?”라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입을 열었는데 막상 나온 말은 당황스러웠다. “나? 나는...!” 갑자기 말문이 막혀버렸다. ‘내가 뭘 좋아했더라?’ 그날 밤 한참을 생각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고민한 게 아니었다. 왜 그 간단한 질문에도 답하지 못했는지 의문이 들어 한참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였던 적이 없었기 때문 아닐까? 해야 하는 일에만 초점을 맞추고 달려왔기 때문은 아닐까.


그 생각들은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졌다. ‘나는 내 어떤 점을 좋아할까?’ 작은 수첩 하나와 펜을 꺼내 들었다. 답변을 내리려다 보니 장점과 단점으로, 어느새 나를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있었다. 단점을 쓰는 것은 역시나 쉬웠다. 나를 낮추는 것이 미덕인 사회에서 살아왔으니 단점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히 쉬울 수밖에 없었다. 정말 자신의 가치를 알고 낮추는 것과 무작정 깎아내리는 것은 다른 일인데, 나는 내 가치를 깨닫기도 전에 낮추는 것부터 배웠다. 그래서 단점을 말하는 일에 더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장점은 달랐다. 생각이 잘 나지 않을뿐더러 몇 가지 떠올리더라도 그대로 쓰기가 어렵게 느껴졌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데 괜히 투명인간 하나를 만들어 눈치를 보며 써 내려갔다. 형체도 없는 그것이 날 비웃을까 괜히 걱정되어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거리며 썼다, 멈췄다를 반복했다.


단점은 한 무더기, 장점은 고작 몇 개. 갑자기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물끄러미 단점 목록에 집중하다 보니 알 수 없는 반발심이 들었다. ‘이게 왜 단점이야? 그냥 내 모습의 일부지.’ 내가 쓴 단점들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맞춰 써진 답변들이었다. 내 시선으로 새로운 관점을 써내려 가보았다.     


낯을 많이 가림--> 처음 보는 사람에게 무례하게 행동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러워함

새로운 환경에 적응이 느림--> 시간이 꽤 필요하지만 한 번 적응하면 내 자리를 확실하게 만들어 냄

너무 예민함--> 느낄 수 있는 감정의 폭이 다양해서 타인의 이야기를 공감하기 쉬움

불편함을 잘 느낌--> 내가 싫어하는 것은 남에게도 안 하기 때문에 배려를 세심하게 함     


사람에게는 여러 모습이 있는데 애초에 두 가지 범주로만 나누려고 시도한 것이 참 웃기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좋은 점이라고 생각해온 부분도, 나쁜 점이라고 생각해온 부분도 모두 나의 일부일 뿐인데. 나는 나일뿐인데. 왜 타인이 나를 함부로 판단하도록 내던져 두었을까. 그리고 왜 그 시선에 휩쓸려 스스로에게 프레임을 씌워 바라보았을까. 나에게 미안해졌다.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자부하던 어린 시절을 잊고 타인의 시선에 갇혀 작은 어른이 된 우리. 진정한 내 모습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만들어진 시선’에서 벗어나는 연습이 필요하다. 타인의 판단을 그저 지나가는 바람으로 여길 줄 아는 여유를 되찾고 편견 어린 시선을 걷어낸 뒤, ‘새로운 내 시선’을 만드는 것. 그 과정을 연습해야 한다.




자신을 괴롭히던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작은 어른은 서서히 두 다리에 힘을 길러나갔다. 자유롭게 뛰어다닐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 마음대로 걸음을 옮길 수 있는 자유가 있음을 믿는 것. 힘을 기르기 위해 작은 어른에게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필요했다. 그동안 그에게 쏟아졌던 시선들은 편견을 만들어냈고, 그 편견은 스스로를 ‘못난 사람’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아닌, '할 수 없다는 어그러진 믿음'이 생겨버렸다. 자신을 작게 만든 그는 그렇게 무궁무진한 가능성에 커다란 자물쇠를 걸었다.


작은 어른은 어느 순간 자신의 발목에 묶인 커다란 자물쇠를 인지했다. 두 다리의 힘을 잃게 된 이유가 오랜 시간 주저앉아있었기 때문인 줄로만 알았던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물쇠가 점점 무거워져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또 다른 한 가지, 그가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질수록 조금씩 자물쇠의 무게가 가벼워진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움직임이 가벼워지기 시작한 그는 거리를 걸으며 사람들을 관찰했다. 자물쇠가 가벼워지니 무게가 아닌 다른 것에도 눈을 돌릴 여유가 생겼다. 거리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자물쇠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뛰어다닐 수 있을 정도로 가벼워 보였고, 누군가는 어떻게 걷고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무거워 보였다. 작은 어른은 서류 가방을 든 채로 뒤뚱뒤뚱 무거운 걸음을 옮기는 이를 바라봤다.


‘저 사람은 자물쇠 무게에 이미 둔감해진 건가. 저대로 두면 곧 주저앉을 텐데...’


무거운 자물쇠를 맨 채 지나가던 작은 어른의 뒤로, 옷가게를 쳐다보고 있는 두 명의 작은 어른이 보였다. 그들은 유리창 안쪽에 진열된 마네킹을 바라보며 옥신각신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 들어보니 마네킹이 입은 옷에 대해 말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저 옷 너무 촌스럽지 않아? 요즘 누가 저런 옷을 사 입어."

"무슨 소리야. 예쁘기만 한데. 요즘 유행이 레트로라는 것도 모르니?"



누군가는 비판을, 누군가는 감탄을 하는 모습을 보며 그는 생각에 빠졌다.

 ‘그럼 저 옷은 대체 어떤 옷인 걸까?’




그는 언쟁을 벌이고 있는 작은 어른들을 뒤로하고 또다시 걸었다. 한참을 걸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던 작은 어른은 횡단보도 앞에 서서 수군거리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그들은 직장 동료에 대한 평가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사람은 매사가 가식이야. 기분 안 좋을 때도 억지로 웃는 척하잖아."

"아니지. 배려심 있는 거지. 상대방 기분 생각해서 힘써 웃어주는 거잖아."



한 사람은 비난을, 다른 한 사람은 칭찬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며 그는 생각에 잠겼다.

‘그럼 저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



작은 어른은 혼란스러움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을 정리했다. 똑같은 걸 보고도 누군가는 좋다고, 누군가는 나쁘다고 말한다면 대체 그 대상은 어떤 존재란 말인가. 더 논리적으로 말하는 사람의 생각이 맞는 것일까, 아니면 감성을 자극하는 사람의 말이 맞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느낀 생각이 옳은 것일까?  


작은 어른은 아무리 애를 써도 좋고 나쁨이라는 두 가지 구분 법만으로는 대상을 규정지을 수 없었다. 그는 이내 깨달았다. 어떤 평가를 하더라도 옷과 사람은 그 모습 그대로 있을 뿐이었다. 긍정적인 평가를 하든, 부정적인 평가를 하든 그저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뿐이었다.



'왜 대상을 두 가지로 나눠야 하지?'




스피노자는 비가 오는 날도 해가 뜨는 날도 그냥 날씨 중의 일부라고 말했다. 다양함이 존재하는 것은 날씨의 특성일 뿐이며 궂은날, 좋은 날로 나누는 것은 인간의 관점이다. 우리도 대상을 바라볼 때 마치 내 의견이 객관적인 기준인 것처럼 착각하곤 한다. 그 잣대로 대상을 판단하기도 하고 역으로 판단당하기도 하면서.


식물의 입장에서 비가 오는 날은 물을 흡수하는 날이다. 반면, 소풍을 가야 하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궂은날이다. 그렇다면 비는 나쁜 존재일까, 좋은 존재일까? 비는 그냥 비다. 받아들이는 대상의 입장과 생각에 따라서 그에 맞는 의미가 부여될 뿐이다. 자신이 느끼는 좋고 나쁨이라는 이분법적인 기준은 객관적이지 않다.


사람 또한 그냥 사람일 뿐이다. 누군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든 나는 나다. 타인의 시선에 따라 내 모습이 달라지는 게 아니라, 나는 그대로인데 그 사람이 자기만의 렌즈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상대가 내 모습 일부를 단점으로 정의하고 규정지어도 그것이 절대적이지는 않다. 그저 많은 사람의 생각 중 하나이다. 모든 것을 두 가지 기준만으로 구분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판단에 지나치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세상은 타인을 장단점으로 규정지으려는 재판관으로 가득하다. 그 속에서 나만큼은 스스로를 기준 없이 바라봐주자. 더 이상 나 자신을 타인의 시선에 내던져두지 않도록.



내 모습 이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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