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공부의 한 예
<<고흐의 구두에 대한 해체론적 독법>>
데리다의 해체론에 따르면 분명한 의미를 갖고 작품의 진리를 완전히 드러내는 예술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작품은 끊임없이 해석이 일어나는 장소일 뿐이다. 1978년 데리다는 그의 저서 「회화의 진리」에서 고흐의 작품 <끈 달린 낡은 구두>에 관한 하이데거와 샤피로의 견해를 비판한다.
① 존재론적 해석 (마틴 하이데거)
하이데거에게 작품의 진리는 예술가의 주관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작가라는 통로를 통해 작품 속에서 열리는 ‘탈은폐(entbergen)'의 사건이다.
② 지시론적 해석 (마이어 샤피로)
하이데거는 문학적인 표현을 통해 구두라는 존재 자체가 발하는 의미를 감춤 없이 드러내 보여주고자 한다. 마이어 샤피로는 하이데거의 이러한 존재론적 태도를 비판하고 사회학적 접근을 시도했다. 작품의 제작 연대를 근거로 이 작품의 구두가 농촌 아낙네의 것이 아니라, 파리에 있던 고흐 자신의 것임을 주장했다. 그는 미술사적 지식을 동원해 작품의 소재를 특정한 대상에 귀속시켜 지시 대상을 구체화 함으로써 하이데거의 해석을 철학자의 현학적 우스갯소리로 전락시켰다.
샤피로의 관점은 그림의 대상이 외부에 존재한다는 재현론의 입장이고, 따라서 그림은 특정 대상을 구체적으로 지시한다는 지시론에 근거한다. 그러나 샤피로의 이러한 시비는 하이데거의 논리 체계를 벗어난 것이다. 하이데거에게는 구두가 누구의 것인지는 애당초 중요하지 않다.
③ 해체론적 해석 (자크 데리다)
데리다는 구두를 일정한 주체에게 복귀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둘을 싸잡아 비판했다. 그림으로서의 구두는 원래의 맥락에서 유리되어 관객들 사이를 부유하면서 다양한 목소리와 복수적 의미, 구두가 지니는 시간과 공간의 차이성과 반복성, 그리고 서로 다른 주체들의 복합성을 부여받고, 차연적으로 끊임없이 유동하며 해석되는 해체적이고 과정적인 주체라는 것이다.
샤피로와 하이데거가 진리를 한 번에 현전 시킬 수 있다는 의미결정론에 입각해 있었다면, 데리다는 다자간 대화를 통해 형이상학적인 결정론적 주체를 해체하여 개방적이고 다중적인 상태로 열어 놓고자 한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처럼 근원적 진리에로의 회귀가 아니라, 해석자와의 만남 속에서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역동적으로 생성시키는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데리다에게 예술 작품은 해석학의 대상이 아니라, 개념화될 수 없는 것의 일시적 흔적의 보존인 셈이다.
「현대미술의 전략」 중에서
미학 이론 책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해서 축약한 것이다. 원문의 길이는 이보다 3배쯤 되고 더욱 어려운 단어와 개념들이 난무한다. 원문을 그대로 옮기기에는 내용이 너무 길고 소모적이라는 생각에 임의로 내용을 요약해 봤다.
자 어떠한가? 나는 이렇게 고흐의 구두 그림을 두고 하는 하이데거와 샤피로의 논쟁, 그것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에서, “도대체 이것들이 뭐 하는 짓인가?” 정말 책을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을 수차례 느꼈다.
하지만 그렇게 성질만 부리고 나면, 무식하고 고집만 쎈 상태에서 정체될지도 모른다. 꾹꾹 참고 공부를 했다. 원문을 다섯 번을 넘게 읽어도 제대로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스스로 요점 정리를 해서 추가로 다섯 번을 더 넘게 읽은 후, 그제서야 비로소 무슨 소리인지 대충 알 수 있었다.
나의 지적 수준과 독해력이 낮아서 그런 것도 충분히 인정한다. 내 생각에는 아이큐가 140이 넘고 사전에 철학 지식이 많은 사람이라면 한두 번 읽어서도 이해가 가능할 것도 같기는 하다. 그냥 평범한 사람의 지적 수준인 나는 쉽게 이해하기가 힘들었고, 힘들게 독해를 해냈으니 같은 내용을 좀 더 쉽게 번역해 보고자 한다.
<그림을 감상하는 여러 방법들>
하이데거: “그림은 보는 사람 마음이야. 각자마다 자유롭게 해석해도 돼.”
샤피로: “야 이 무식한 놈아, 그러면 안 되거든. 작가가 의도한 바가 중요한 거야. 니가 해석한 것은 니 생각이고 틀렸어. 고흐가 의도한 것은 그게 아니란 말씀이야.”
데리다: “옆차기들 하고 있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떤데? 어차피 관객들한테 설명해 봐야 못 알아들어. 니들도 그냥 각자 알아서 꼴리는 대로 해...”
결국은 이 내용이다. 이 쉬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세 명의 위대한 잘난 척 하이엔드 고수들은 거창한 존재론, 지시론, 재현론, 해체론, 현전, 의미결정론 등을 갖다 붙여서 최대한 어렵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잘난 척 대마왕 들이 하는 이야기를 또 그들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그들과 성향이 비슷한 재야의 지식인들이 공부해서 앵무새처럼 따라 하고 너무 그대로만 하면 민망하니까 조금 변형해서 더 어렵게 말하는 것뿐이다.
“너네 이런 거 모르지? 나는 이런 것도 알아!” 그 속마음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이들은 어떻게 하면 어려운 것을 쉽게 전달할 수 있을까 에는 관심이 없고, 어떻게 하면 쉬운 것도 어렵게 전달해서 저들이 당황하게 하고 격차를 더 벌릴 수가 있을까 에만 골몰하는 유형의 지식인들이다.
미술 공부라는 게 대체로 이런 식이다.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어렵게 설명해서, 이미 알고 있고 고민했었던 문제조차 모르는 것이고 처음 접하는 문제처럼 느끼게 해 주는 것이다. 한 번 읽고 이해되고 기억될까 봐 아무리 공부해도 아스라하게 사라지도록 모호하게 만드는 일이다.
덧붙임: 이 평론가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부한 부분이 나에게 도움이 된 부분도 있었기에, 한 저자의 책을 모두 부정하는 것 같아 마음에 걸린다. 어떤 부분은 내게 크게 와닿고 좋은 내용도 있었다. 하지만 굳이 이렇게 억지로 어렵게 이야기해야 하는지 생각이 드는 부분도 많이 섞여 있음을 이야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