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양이 취향의 지점을 결정한다
나는 대학원이나 유학 등에 대해 크게 고민해 본 적이 별로 없다. 살짝 고민해 본 적은 있다. 세 번째 개인전이 끝나고 역시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자, “내가 어딘가에 소속되지 못하고, 아는 사람도 거의 없이 독고다이로 혼자 깝쳐서 이런 건가? 지금이라도 그냥 무릎 꿇고 대학원에 들어가야 하나?” 하며 한 번.
그리고 그때 즈음, “더 늦기 전에 교육대학원에라도 진학해서 교원자격증이라도 따놔야 하나?” 하고 고민하며 몰래 원서를 작성하고 준비를 시작하려던 참에 아내에게 걸려서, 아내의 반대에 바로 접었던 적이 있다. 시간적 으로나 깊이적 으로나 잠깐 가볍게 고민했었는데, 그게 전부이고 그냥 나 스스로 그것들의 필요성을 별로 못 느껴서 그랬던 것 같다.
일단 학교 다닐 때 대학원 선배들의 작업이 별로 좋아 보이지가 않았다. 학부생들과 비교해서 역시 대학원생들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 고려해 봤을 만도 한데, 그때의 내 생각은 “미술은 참 공부를 할수록 더 이상해지는구나!”이었다. 유학을 갔다 온 이들의 작업을 볼 때도 그런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미술을 꼭 이렇게 난해하고 지루하게만 해야 하나? 유학을 갔다 와서 그런 건가? 시간 들여 돈 들여 공부를 더 하고 오는데, 작업은 왜 더 이상해지지?” 그런 나의 기준을 가지고 혼자서 그렇게 생각했었다. 혹시라도 유학 갔다 오면 나도 저렇게 될까 봐 두려운 마음까지 생길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교육과 흐름에 목욕당해 내가 아닌 나로 다시 태어나려니, 그냥 지금 내 수준에서 생각하고 표현하는 것들이 차라리 더 낫다고 생각했었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한심하고 부끄럽다. 밑도 끝도 없이 어디서 그런 자만심이 솟구쳤었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서있는 위치에 따라 각자 다른 것을 원한다
나는 미술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신비주의로 가면서 보통의 사람들과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져 가고 결국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 버리는 것에 대한 불만과 반감이 컸다. 그게 옳아 보이지도 않았고 멋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차라리 내가 낫다고, 그리고 그냥 그런 추세 따라가지 않아도 그냥 내 방식으로 해도 될 것 같고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방식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대단할 것도 하나 없는 것이었다. 미술 전공자 입장에서 보자면 그저 구태의연하고 이미 한참 전에 지나가버린 시대착오적인 방식일 뿐이었다.
결국은 어디의 눈높이와 입맛에 맞추느냐의 문제이다. 미술계라는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들과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동시대를 살고 있지만 서로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테두리 밖의 보통의 평범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미술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에 대해 큰 관심이 없다. 지루할뿐더러 어렵기만 하다. 물론 현학적인 말장난에 재미를 느끼고 지적인 오르가즘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다. 그런 사람들은 정신없이 변해가는 현대미술이 적성에 맞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가 버린 인상파 화풍이나 서정적이고 그냥 보기에 아름답고 장식적이거나 조금 더 쉽게 인지하고 느낄 수 있는 작품들 정도에 반응을 하고 그 지점 정도에서 멈춰져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이미 오랫동안 반복되어 온 ‘클리셰’라는 것을 인지를 못하는 것이다.
이런저런 영화들의 명장면을 짜깁기해 만든 표절 범벅의 영화가 있다고 치자. 이제 막 어른들의 영화를 보기 시작한 아직 백지상태의 순수한 중학생이라면, 그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고 재미있어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고전은 다 섭렵했고 웬만한 영화는 다 본 영화광이나 평론가 입장에서는, 중학생이 재미있게 본 그 영화를 달갑게 볼 리 만무하다. 어디서 본 듯한 장면들만 충분히 예상 가능하게 펼쳐지는 그 영화에 대해서 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예가 미술에서도 그대로 투영이 된다. 아직 영화를 많이 보지 않은 상태에서 그저 재밌으면 되는 영화를 찾는 중학생은 미술계 바깥의 일반 대중과 같고, 이미 나온 영화는 다 봤고 새로운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영화평론가는 미술계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들과도 같다.
그 두 영역의 사이에서 어느 지점에 서 있느냐에 따라 또 세분화할 수가 있다. 완전히 원의 코어에 서 있는 사람이 있고, 원 안 어딘가에 서 있는 사람이 있고, 원 테두리 근처의 안과 밖의 접경지역 부근에 서 있는 사람이 있고, 테두리에서 멀지 않은 바깥에 서 있는 사람이 있고, 테두리에서 완전히 멀리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사람이 있다. 이런 상황은 아마도 시간이 많이 흘러 한 두 세기가 더 지난다고 해도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대학원이나 유학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때는, 원 바깥에 있었던 것이다. 미술대학에 다니고 있었지만, 공부를 안 하고 무식해서 비교적 순수한 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원 안으로 들어갔지만 더 이상 코어 쪽으로 가지 않고, 그 근방에서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 같다. 일단은 대부분 어렵기만 하고 굉장히 지루하니까 코어 쪽을 동경하거나 좋게 보지 않았었고, “나는 그쪽으로 휘말려 들어가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어렸을 때의 다짐 때문인지 나까지 코어 쪽으로 완전히 가고 싶지는 않은 것이 아직까지도 나의 생각이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나 역시도 “이런 방법과 표현은 너무 구태의연하고 이미 유통기한이 다 한 것 아닌가?”하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리고 달갑게 보지 않았던 코어 쪽에 위치한 작업이 내게 와닿을 때가 있는 것이다.
이건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음악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대중적인 선호도가 높은 지점이 있다는 것을 전문가들도 알고 있지만 매일 그런 것만 보고 사는 전문가 입장에서는 그런 방식이 지겨워지고 새로운 것이 해보고 싶기 마련이다. 그런데 접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어서 아직 그런 것들이 지겹지 않은 대중들은, 그냥 클리셰 적인 감성에 머물며 그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스포츠는 클리셰가 없기 때문에, 아니 더 완벽한 클리셰를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코어 쪽으로 갈수록 사람들의 열광을 이끌어내고 인정을 받는다. 그런데 미술은 코어 쪽으로 갈수록, 보통의 사람들과는 점점 멀어진다. 미술계 내부의 인정을 받고 그것으로부터 비롯되는 권위가 생길지는 몰라도.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나?
원 안의 코어에 해당하는 작품들을 딱 한 마디로 정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다. 너무나 다양한 작품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여태껏 해왔던 대로 ‘현대미술’이라고 하자.
나는 어렵고 지루한 많은 현대미술에서 무엇을 느끼거나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보다 공부를 더 많이 했고 미술을 더 안 다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상찬 했다. “내가 무식해서 그런 것인가?” 나를 돌아보며 공부를 했다. 지금까지 20년이 넘게 고민했고, 공부했다. 그 정도면 나도 적지 않은 정도는 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생각과 태도가 바뀌었느냐?
나는 아직도 손짓 몇 번에 수십억 또는 수백억의 가격이 되는 대가들의 작품을 보면 아무런 미술적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물론 감동이 목적인 작품들이 아니고 그 안의 지적인 사유가 담겨져 있는 작품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유들도 대부분 나에게 크게 와닿지 않는다. 아무나 해낼 수 있는 일은 분명히 아닐 텐데, 이런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낸 것에 대한 경의가 생길 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꼬여있고 포용력과 이해력 그리고 예술적 감수성이 부족하고 독선으로 무언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아니면 좀 꼬장꼬장하고 외롭지만 더 솔직하며 진실을 갈파하려는 사람일 수도 있다. 둘 중에 어느 하나 또는 그 사이 어디쯤 일 것이다.
낙서 같은 방식의 그런 대가들의 작품들을 좋아하지 않거나 분노까지 치미는 사람은
① 무식하고 고집 세고 피해의식에 절은 사람
②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
사이에 어디쯤 일 것이고
그런 작품을 좋아하고 인정하는 사람은
③ 교양과 학식이 높은 사람
④ 교양과 학식이 높은 척하는 사람
사이에 어디쯤 일 것이다.
그런데 파고 들어가면 더욱 복잡해진다. 왜냐하면 돈과 이익 문제가 결부되기 때문이다. 미술품을 투자의 대상으로 보면 더욱 복잡한 고차방정식이 되어 버린다.
작품이 좋아서 작품을 사는 사람보다는, 작품이 좋다니까 그것의 가격이 오를 것 같으니까 사는 사람이 더 많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을 ③, ④중 하나로 볼 수 있을까? 그중에 하나로 볼 수도 있지만, 손익이 결부가 되면 사람들은 필사의 자세가 되고 그것의 진실이 중요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이 많아지는 것만이 중요해 질뿐이다.
2021년도의 미술시장 호황기 동안 우리나라의 생존 작가 중 가장 비싼 작가인 이우환의 가격은 2배가 되었고, 대량으로 찍어낸 그의 판화작품의 가격도 4배로 치솟았다고 한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작품에 투자할 수 있는 판화작품을 많이 산 이들은 미술시장에 신규 유입된 MZ세대들이다. 그들 중 이우환 작품의 예술적 실체와 가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가상화폐가 정말로 실체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가 무엇이 중요한가? 그저 내가 더 낮은 가격에 사서 더 높은 가격에 팔면 되는 것이지.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대부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