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안’은 과연 진짜로 존재하는 것일까?
그것은 믿음일 뿐이다. 현실에서는 결과론적으로 증명되는 수밖에 없다. 주식 투자와 비슷하다. 예를 들어 저평가되어 있는 어떤 작품을 찍었는데, 차후에 그 작품의 가격이 많이 올라갔다고 치자. 그런 경우에 우리는 보통 ‘심미안’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가격이 많이 오르면 그 작품이 꼭 미술적 가치가 있고 좋은 작품이고, 가격이 오르지 않으면 가치가 없고 후진 작품일까? 작품성과 가격의 상관관계가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작품 값이 오르고 안 오르고는 작품의 수준이나 질 외에도 다른 여러 가지 수많은 요인들이 복합되어서 나타나는 결과이다.
때로는 허접한 작품이 높은 가격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정말 좋은 작품인데도 주목받지 못하고 가격이 매겨질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사장되는 경우는 허다하다. 우리는 결과론적으로 시장에서 살아남은 작품을 좋은 작품이라고 부르고, 선택되지 못한 작품들을 좋지 않은 작품이라고 부를 뿐이다.
만약에 누군가 진짜 심미안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가 저평가된 작품을 찾아냈는데, 그 작품은 정말 좋은 작품이었지만 끝내 운이 닿지 못해 외면당했다고 한다면 그가 심미안이 있다고 어떻게 증명할 수가 있는가? 그것은 심미안이 아닌 것으로 규정된다. 심미안은 높은 미적 가치와 높은 가격이 동일한 것일 때 가능한 개념이다.
그런데 높은 가격이라고 무조건 좋은 작품이라고 볼 수만은 없고 마찬가지로 낮은 가격이라고 꼭 후진 작품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것을 수용하면, 심미안이라는 개념은 무너져 버린다. 그것이 좋은 작품이라는 것을 완벽하게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격이 오를 작품을 맞추는 능력은 ‘심미안’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투자의 촉’ 내지는 ‘돈을 보는 눈’ 내지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그렇지만, 이름은 참 예쁘고 멋있게 지어진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파고 들어가면 허상인 것들은 수두룩하다.
‘선견지명’에 대하여
결과적으로 누군가는 맞출 수밖에 없는 것이고, 맞춘 사람이 ‘선견지명’이 있는 것으로 규정될 뿐이다. 단순화시켜 예를 들어보자. 100명의 작가가 있다고 치자. 그중에 참 좋은 작업이어도 타이밍이 안 맞거나 운이 없게도 그 작업의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90명의 작가는 초기에 사라진다.
10명 중에서 1번 작가를 사는 사람이 한 명 있고, 2번 작가를 사는 사람이 한 명 있고... 10번 작가를 사는 사람까지 한 명씩 있다고 치자. 그러면 최종적으로 살아남는 작가는 1명인데, 누구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1번부터 10번 중의 한 사람 일 것이다. 그중에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작가를 산 사람이 결국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대통령이 될 사람을 맞추는 점쟁이는 각 후보마다 존재하고 결과적으로 맞춘 사람이 용한 점쟁이가 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점쟁이 100명 중 1번 후보 25명, 2번 후보 25명, 3번 후보 25명, 4번 후보 25명이 예측한다면 25명은 용한 점쟁이가 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정말 용한 것인가?
좀 더 어려운 것을 맞추는 것도 같은 원리이다. 김일성이 죽는 날을 맞춘 점쟁이가 있는데, 김일성이 죽을 때쯤 돼서 1월 1일 서부터 12월 31일까지 각 날마다 점지한 점쟁이가 365명이 있으면 그중에 한 명은 맞출 수밖에 없다. 그 해에 틀리면 다음 해에 또 365명이 각 날마다 포진하면 된다. 그러면 언젠가 누군가는 정말 신기하게도 맞추는 점쟁이가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그 점쟁이를 정말 용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복권 당첨되는 사람을 보고 선견지명이 있다고 하는 것과도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작품성이라는 것을 비교 평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상정을 하고 어떠한 의도나 작전이 개입되지 않을 때의 상황을 가정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더 복잡해진다.
작품성을 정확하고 세밀하게 비교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하다. 턱도 아닌 것들을 쳐낼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턱도 없는 것들도 기적의 논리와 담론을 만들어 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등극시키려면 그것도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에 또 완전한 정의가 불가능해지고, 가능한 것도 같지만 정확히 따지면 불가능하다는 너저분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힘 있는 자들의 욕망과 의도가 개입된다는 것이다. 마치 주식의 작전처럼 말이다. 따라서 현실에서 심미안이나 선견지명이라는 것은, 비공개 불투명 고급 정보에 더 빨리 접근할 수 있는 정보력과 그 이너서클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능력 정도에 가장 가까운 개념 정도가 될 듯싶다.
‘안목’에 대하여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작품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라는 것이 있을까? 그런 것은 없다. 믿음과 환상이 있을 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안목이라는 말의 의미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것의 의미를 원래대로, 그냥 개인의 취향과 의견 내지는 세련된 눈썰미 정도라고 한다면 굳이 없다고 할 필요까지는 없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안목이라는 단어에, 과한 환상을 입히기 마련이다. 심미안과 같이 숨겨진 보배를 찾아내고 미래를 예측하는 눈이라고 한다면 그런 것은 없다. 없던 권위를 있게 만들 수 있는 힘과 그 힘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한 발 앞서 알아낼 수 있는 정보력만이 존재할 뿐이다.
컬렉터의 철칙 중에 “니 눈에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공부하고 조사해서 정보를 습득하고, 남들이 인정하고 나중에 가격이 오를 만한 것을 사라는 말이다. 큰돈을 들여 작품을 살 때만큼은 미술작품이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투자의 대상임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모두가 좋아하고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것은 없으며 모두의 취향과 의견이 다를 진데, 개인의 안목은 종국적 현실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술은 주입되는 것’ 임을 증명하는 단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좋은 작품을 보는 눈’이라는, ‘안목’이라는 것은 애초에 없다. 그런 단어와 개념이 존재할 뿐이다.
미술에 있어서 ‘안목’이라는 단어로 통용되는 것은 어떤 작가가 부상하고 어떤 작품의 가격이 오르게 될지를 비교적 정확하게 예측하는 능력일진대, 그것은 본질적인 예술성이나 가치와는 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답이 없는 것이고 강요할 수 없는 것이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강요되고 주입된다.
현실에서 안목이라는 것은 심미적인 것의 가치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이 아니라, 과거의 데이터와 현재 어떤 움직임이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정보력인 것이다. 그것은 그들만의 리그인 ‘이너서클’ 안으로 들어가 저 위에서 계획되고 만들어지는 고급정보를 더 빨리 캐치해 낼 수 있는 능력이다. 어떤 작가가 메이저 갤러리에 의해 발탁되고 어떤 갤러리가 어떤 작가를 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지 등의 정보력 말이다. 그것은 예술성이나 개인의 취향 또는 대중의 취향 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