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에 나는 동의할 수 없
위대한 미술평론가 K
현대미술의 헤게모니를 유럽에서 미국으로 가져오는 데 있어서 지대한 역할을 한 일등공신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1939년에 쓴 그의 저서 「아방가르드와 키치」에서 “교양 있는 관객이 피카소의 작품에서 끌어내는 최종적인 가치는 조형적 가치에 의해 남겨진 즉각적 인상에 대한 숙고의 결과로 이차적 거리에서 파생된다.”라고 했다. 나는 이 말이 무슨 개소리인지 아무리 이차적 거리에서 최종적으로 생각해 봐도 도저히 알 수가 없지만, 피카소의 그림 설명이기에 굳이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안다.
또한 그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모조된 상품문화를 ‘키치’라고 명명하고, 이로부터 미술의 순수한 기능을 지키고자 했다. 그가 생각하는 키치는 아주 저질스러운 대중들의 싸구려 욕구에 부응해 만들어진 타락한 문화이다.
“키치는 참된 문화의 가치에 무감각하고 단지 오락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위해 생겨난 저급 문화이다. 또 그것은 순수문화의 타락하고 공식화된 모조품을 표본으로 하여 공식에 의해 기계적으로 제작하는 대리 경험이자 가짜 감각이며, 돈을 위해 우리 시대 삶에 있어서 모든 가짜를 축약해 놓은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대중들의 저급한 요구에 의해 미술이 타락하는 것을 우려했고, 그러한 위협으로부터 미술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기가 무슨 대단한 ‘미술님'의 마지막 충성 수호자 인양 이야기 하고 있다. 키치는 저질스러운 대중들의 싸구려 욕구에 부응해 만들어진 타락한 문화라면, 그가 주장하는 미술은 고급스러운 귀족들의 존귀한 열망에 부응해 제작된 세련된 문화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 존귀한 미술은 그가 비난한 자본주의 시장의 수요와 상관없이 고고하게 가는가? 순수미술은 키치처럼 대리 경험이자 가짜 감각이 아니고, 손수 경험이자 진짜 감각이고 돈을 추구하지 않고 진짜들을 모아 놓은 것인가?
이 얼마나 귀족적이고 위선적이며 특권의식 가득 찬 예술관인가? 그가 마침내 현대미술의 대가로 만들어 낸 윌렘 드 쿠닝의 그림을 한 번 봐 볼까? 사람 약 올리는 그림의 최절정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린버그는 이 천재적 메롱 작가의 그림에 ‘처소 없는 재현’이라는 그럴듯한 평론을 붙여서, 결국 ‘전통과 모더니즘을 독창적으로 조화시킨’(여기서 나는 또 승모근이 뭉쳐서 뒷 목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미술사의 레전드로 등극시키고 말았다.
그린버그는 지나간 시대의 꼰대 평론가이고, 그의 이론은 후배 평론가들에 의해 공격을 당하기도 했지만 미술사의 한 자리에 중요한 이념이자 사조로 자리 잡고 있다. 그의 ‘키치’ 이론을 조롱하고 그가 폄하했던 키치스러운 작품을 가지고 역설적으로 현대미술의 최고봉에 오른 작가들도 있다.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스타인, 제프 쿤스, 무라카미 다카시 등의 수많은 팝아트 작가 말이다. 하지만 그의 귀족적이고 위선적인 예술관은 여전히 세상에 깊숙이 침투해 힘을 갖고 존재하며 면면히 흐르고 있다.
공부의 명분은 스스로 끝까지 만들어 내고 유지해야 한다
미술 이론에 대한 공부를 하다 보면, 미술과 미술 이론 공부에 대한 환멸이 느껴질 때가 많다. 말장난의 향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게 뭐 하는 짓거리인가?, 도대체 이런 것들을 따지고 주장하는 것들이 뭐가 중요하다는 말인가? 하는 회의가 밀려오는 것이다.
지적 우월감에 아는 척하기 좋아하고, 잘 모르는 내용 앞에서 당황하는 사람들과 화려하게 말했을 때 굴복과 추종의 눈빛을 보는 쾌감의 중독자라면 이런 공부가 재미있을 것도 같다.
그런 것들은 미술사적 지식을 보완해 주고 언젠가 대답을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내게 책임지어진 시간과 공간을 앵무새처럼 암기된 소리로 채워준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다. 그리고 무언가 어려워 보이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미지의 세계를 점령하는 것처럼 보이는 장점도 있다. 그래서 그걸 파고 공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내 전공 분야이기에 어쩔 수 없이 하기는 하는데, 하면서도 “이게 참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수도 없이 들었다.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지금으로부터 백 년도 더 전에 그 당시의 철학에 대해서, 지금 내가 미술 공부에 대해서 말하는 식의 분위기로 회의적인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많은 철학적 형이상학적 논쟁을 단 1달러의 가치도 없는 무의미한 논쟁으로 규정짓고 실용주의 철학을 태동시키는데 일조했다.
나중에 실용주의와 형이상학을 이분법적으로 정확하게 구분 지을 수 있는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한계에 봉착하기는 하지만, 지나간 그의 주장과 질문이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철학과 이란성 쌍둥이가 되어버린 현대미술도 같은 질문이 던져지고 같은 한계에 봉착하기 때문이다.
클레멘트 그린버그, 해롤드 로젠버그, T.J. 클라크, 마이클 프리드, 토마스 크로우, 마이어 샤피로, 폴 크로우더...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고 퍼 나른 것인지 모르겠는, 쉽게 전달한다면서 결국 암호로 가득 채워놓은 국내의 역자들과 저자들. 미술 이론을 공부하다 보면, 먹고사는 걱정이 없어서 쓸데없는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시간이 남고 너무나 심심해서, 벌레가 지나가는 사건을 공룡 만하게 확대시켜서 기어이 말싸움을 벌이고 이기고 싶어 하고 잘난 척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처럼 보인다.
그것들이 왜 중요한 것인지 모르겠고 어렵고 지루하기만 한 내용들에 대해 지적 열등감과 막연한 승부욕을 가지고 도전하는 일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평론가들에게는 그들이 먹고사는데 아주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아 이래서 사람들이 미술과 더 멀어지는구나… 그것이 이들의 실제 목적이었나? 그래야 소수만이 향유할 수 있을 테니.
“원래 미술이라는 것이 전문 영역이다. 그것이 쉽게 얻어질 줄 알았냐?”라고 한다면 그 말도 맞고 할 말이 없어지기는 한다. 하지만, 꼭 그래야 하는 건지 나는 계속 질문이 던져지는 것이다.
화가 나고 쓸데없는 짓이다 느껴지면 그만 투덜거리고 그냥 안 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굳이 참고 한 이유는 내 전공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냥 자기 세계에만 갇혀있는 꼰대 작가가 되기 싫어서 그래도 노력을 해본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마음을 닫으면 편견이 생길 수 있으니까, 노력해서 들어보고 마음을 열어보면 무언가 그전에는 내가 협소해서 못 담았던 것들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감과 인내심을 가지고 미술 이론을 공부했다.
아마도, 미술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미술가를 꿈꾸었다가 미술사를 공부하다가 미학 이론을 공부하다가 미술가의 희망을 때려치운 사람도 꽤 될 것이라고 본다. 이론을 공부하다 보니 순수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미술이 재미없고 지루해져서 일수도 있다.
기존에 했던 것을 답습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텐데, “아 나올 것이 이미 다 나왔고 나올 주장은 다 나왔구나.”, “빈틈이 남아있지 않고, 빈틈을 찾아낸다는 것이 너무나 어렵겠구나.” 하고 현실을 자각하고 그만두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가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고 좋다고 인정받는 지점을 찾아야 하는데 이런 것들을 고민하는 것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하고 그만두는 사람도 있을 테고, 여타 이런저런 이유로 미술 이론 공부를 하다가 미술을 그만두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돈 벌어야 하는 현실적인 이유로 그만두는 사람들이 가장 많을 테고.
포기하는 것이, 그만두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별로 이유가 없다고 느껴지는데 계속 붙잡고 있는 것이 더욱 나쁜 것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스스로 깨닫고 일찍 그만두게 해주는 것은, 너무나 치열하고 성공의 확률이 희박한 곳에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빠져나갈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좋게 볼 수도 있다.
그래도 할 수 있다면 당연히 하는 게 낫다
그렇다면 이론 공부를 안 하는 것이 나은가? 이론 공부를 깊이 파고 들어가지 않는 상태에서 작업을 하는 작가도 꽤 많다. 그런 관념들에 얽매이기 싫어서 일수도 있고, 관념들이 와닿지가 않고 불필요한 허세로 느껴져서 일수도 있고, 공부를 하려고 하는데 어느 순간 책 위에 나도 모르게 흘린 침자국만 반복적으로 발견하다가 공부를 포기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론가가 아니고 플레이어인데 꼭 이론에 빠삭해야만 하나? 많이 안다고 좋은 작업이 나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고 생각하고 그냥 작업하는 작가도 있을 것이다. 사실은 다 내가 예전에 했던 생각과 행동들이다.
이론 공부를 파지 않은 상태에서도, 자신만의 필살기로 꺼낸 아이디어와 콘텐츠가 먹히고 성공하는 경우도 있다. 이재효 작가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예이다. 작가 스스로도 이론의 무용성과 말거품의 허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작품 자체도 그냥 말이 필요가 없는 작품들이다. 재료의 군집으로 이루어진 스케일과 조형성 하나로 끝나는 작품인데 말 그대로 ‘말이 필요가 없는 작품’이다.
결과적으로 이재효는 그의 스타일대로 일성을 이루어냈고, 말이 필요가 없는 작품들을 추구하는 작가들도 많다. 그런데 그렇게 말이 필요가 없는 작품들조차도, 말이 필요가 없는 것인데도 결국은 또 말거품들을 만들어 내고 만다. 말해 달라는 설명해 달라는 무형의 압박과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만의 것을 찾아 기존의 것과 겹치지 않고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 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은 대부분 거기서 거기다. 나만의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알고 보면 이미 누군가가 했던 것일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아주 쇼킹하고 기발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도 알고 보면 이미 다 나와 있는 것일 확률이 높다. 새로움이라는 것은 미술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다 미개척지를 찾고 기발한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해 애를 쓴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는 완벽하게 새로운 것은 불가능하고, 기존에 있던 것들을 표절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만큼만 영리하게 조합해서 나만의 독창성으로 인정받는 것이, 현대미술에서 살아남는 법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마나한 말을 하는 것이 쉽지 막상 그것을 현실에서 해내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을 해 낸다고 해도 그것이 또 인정받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나의 경우만 해도 많은 시간 동안의 고민과 삽질의 시행착오를 통해 나만의 것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데, 나 혼자만 그것을 인정하고 이것을 알아주는 이가 아직 없다.
당연한 결론이지만 그래도 할 수만 있다면 공부를 하는 게 낫다. 공부를 안 하면 원시의 상태에서 순진하기만 하고 수준이 낮은 상태에 머물게 된다. 또한 논리가 없으며 미 개척된 상태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무식함으로 인한 자신 없음과 자기 비하적 심리 상태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무식한데 당당해서 부러운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공부를 하고 노력을 해봐야 자기가 진짜 옳았던 것인지 아니면 그저 무식해서 우겼던 것인지를 스스로 판단하고 막연한 자신 없음과 두려움에서 조금이라도 더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이론이나 다른 사람의 주장에 매몰되지 않고 자기 생각을 정리하고 찾아가는 것이 좋겠지만, 뭐 매몰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와닿고 동의가 된다면 그 지점에서는 매몰이 아니라 내재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감이 되는 입장이라면 습득과 성장 그리고 성숙과 업그레이드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힘의 논리와 생존의 관점에서도 공부는 필요하다. 하기가 싫고 재미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그렇지, 공부를 한다는 것은 언어를 습득하고 논리를 갖추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신의 전지적 관점에서 얼마나 정확하고 정의로운지와 별개로, 말하지 못하는 무지의 상태보다는 정확하지 않은 것을 말하더라도 논리가 있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우월한 지점을 점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공부를 하고 빈틈을 찾아 그곳에 자신의 깃발을 꽂는 것이 가장 좋다. 하지만 하다 보면 많은 모순과 딜레마와 만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