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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은 ‘벌거벗은 임금님’ 인가?

미술에 대해 정말로 궁금한 것들

by 김경섭

별 이야기


요즘 학생들은 상상하기 힘든, 사랑이라는 이름의 체벌과 폭력이 난무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35년 전 예전 국민학교 시절에, 반에서 단체 기합을 받은 적이 있다. 모두가 책상 위에 올라가 무릎 꿇고 손을 들고 벌을 서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깨 근육이 아프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아이들의 팔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을 때,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정말로 잘못을 뉘우친 사람은 칠판 위에 붙어 있는 태극기 그림에서 별이 보일 것이다.”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치고 그 증거로써 별이 보이는 사람은 팔을 내리고 의자에 내려가 앉아도 된다고 하셨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 “어? 진짜 별이 보이네?” 하며 손을 내리고 의자에 앉는 누군가가 있었고, 곧이어 소수 몇 명의 아이들도 자기도 별이 보인다고 신기하다며, 손을 내리고 의자에 내려앉았다. 그렇게 몇 명의 아이들은 별이 보인다며 고통의 시간으로부터 탈출을 했다. 잘못을 충분히 반성한 나머지 아이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제발 눈앞에 별이 나타나길 기도하며 버티는 중이었다.


선생님은 그즈음 단체 기합을 중단하고, 그때까지 내려가지 못하고 버티던 아이들을 의자에 앉게 했다.

그리고 별이 보인다는 학생들을 다시 앞으로 불러냈다. 그리고 그 애들은 이번에는 손바닥 난타의 제물이 되었다. 그 시절에는 초등학생 귓방망이도 다반사였는데, 진짜로 별을 보게 된 것이었다.


이 우스운 광경을 현대미술을 감상하는 사람들의 풍경에 빗댈 수 있다. ‘벌거벗은 임금님’과 비슷한 이야기이다.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는 임금님의 옷이 선한 사람들의 눈에만 보인다고 하는 사기꾼 재봉사들에 의해 어리석은 사람들이 속고,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은 잘못을 뉘우친 사람에게만 별이 보인다는 선생님의 거짓말 유혹에 순진한(?) 아이들이 넘어간 것이다.


“현대미술은 ‘벌거벗은 임금님’이다.”라는 말은, “이것을 느끼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교양이 없는 사람이다.”라는 분위기 때문에 사람들은 짐짓 이해한 척하고 감동을 느낀 척을 한다는 것이다. 현대미술 혐오론자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계속해서 시치미를 뚝 떼고 찬양하는 사람들을 보며, “혹시 진짜로 임금님이 옷을 입은 건가?… 내 눈에만 보이지 않는 건가?” 하고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현실은 동화보다 더 복잡하고 문제는 임금님의 옷처럼 명확하게 밝혀낼 수가 있는 것이 아닌 한 차원 더 높은 문제이기 때문이다.


동화에서는 임금님이 실제로는 옷을 입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지만, 현대미술은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완벽하게 증명할 수가 없는 문제이다.


미술에서는, 임금님이 진짜로 멋있는 옷을 입고 등장할 때도 있고, 전혀 멋있지 않은 옷을 입고 등장할 때도 있고, 난해한 옷을 입고 등장할 때도 있고, 벌거벗고 등장할 때도 있고, 벌거벗고 등장했지만 마음의 눈으로 보라고 할 때도 있다. 그 외의 모든 다양한 경우의 수가 있는데 그 경우들을 명백하게 구분할 수가 없다.

그 지점이 미술의 특성이고 본질이다. 각 경우들의 경계선이 없고 붙어 있어서 어떠한 경우라고 확언하기가 애매해진다. 작품을 보면서 사람들은 생각을 보고 믿음을 보는 것인데, 그것을 아무것도 안 보이면서 보이는 척한다고 딱 잘라 말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동화에서는 아이를 제외한 모두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지만, 현실의 미술에서는 일부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현대미술을 간단하게 정의할 수 없는 ‘귀납법의 한계’가 등장하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이야기하도록 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화가 가지는 힘은 여전히 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눈치를 보며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현실은 더 복잡하기 때문에 동화처럼 단정 지을 수가 없다.


어? 벌거벗은 것이 아닌가 보네…


현대미술이 ‘벌거벗은 임금님’ 광경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꽤 많이 있고,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경중이 다를 뿐이지 완전히 부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끼리 인터넷에서 모여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구나.” 교감하고 위로받고, 나름 공부 좀 하고 깊이 있게 파고드는 동지의 너무나 반갑고 공감 가는 논리를 공유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들 내부에서만 또는 중립 지대에서 갈팡질팡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먹힐 뿐이다. 현대미술 찬양론자들의 견고한 성 앞에서는 바위에 던져진 계란처럼 허무하게 깨져버리고 만다.


“너희는 벌거벗은 임금님을 찬양하는 위선적인 거짓말쟁이일 뿐이다.”의 일갈에, 진실을 들킨 듯 부끄러워하며 흠칫 조금이라도 절 줄 알았는데, “무식한 니가 보기엔 그렇겠지.” 더욱 자신감에 찬 경멸 섞인 미소와 흔들림 없는 확신을 본다면, 주춤 또 흔들리며 위축이 될 수밖에 없다.

그냥 막무가내로 우기는 수준이 아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현란한 논리의 향연을 과시하고, 권위가 가득 실려 바짝 쪼그라들게 만드는 근거들이 제시된다. 이 작가가 얼마나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지와, 내로라하는 유수의 미술관에서의 전시 경력과 기록적인 경매낙찰가 등을 근거로 들이댄다.


힘의 크기가 차원이 다른 절대강자 앞에서는 아무리 내가 옳다고 해도 결국 무조건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처럼 위축이 될 수밖에 없다. 세상이 이미 그를 대가로 인정했고 현란하게 이유를 설명하는데 내가 그것을 거부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현대미술 대가들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입되는 보통의 풍경이다.


그리고 그것을 먼저 인정하고 추종하듯 예술적 미감에 흠뻑 빠져 있다고 은근히 과시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보다 돈과 사회적 자산을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다 보면 나의 현대미술에 대한 분노는, 익명이 보장되는 인터넷 공간 정도에서만 그것조차도 아주 소수만 분출할 수 있을 뿐, 현실 세계에서는 거의 꺼낼 수가 없게 된다.


현실과 동화는 다르다


그렇게 현실은 동화처럼 만만치 않다. 동화 속에서는 거짓말을 한 사람들의 위선이 들통이 났고, 내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도 거짓말한 아이들은 더 혼구녕이 났다.


현대미술 부정론자들은 우리들의 삶에서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겠지만, 현실에서는 별이 안 보인다고 하는 사람들은 무식하고 교양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기 일쑤다. 아무리 곤욕스러워도 별이 안 보인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게 왜 안 보이냐고, 공부 좀 하라고 이야기한다.


현대미술은 그렇게 간단하게 결론이 지어지지 않고 진짜로 별이 보인다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들은 소수이지만 자본과 자신감이라는 힘을 가지고 분위기를 주도한다.


‘본다.’ ‘보인다.’는 것의 개념이 확장되기 시작한다. 눈으로 보는 것만이 보는 것의 전부가 아니고 마음으로 보는 것도 보는 것이다. 눈을 감고 보라고 하면 더더욱 그것을 부정하기 힘들어진다. ‘본다’는 것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른 것이며 누군가는 그것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면 진짜로 별이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벌거벗은 임금님 우화는 여전히 확실히 고전명작이고 그 안에는 시대를 가로지르는 날카로운 통찰과 풍자가 있다. 눈치를 보며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무더기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하고 평면적이다. 세상은 그것보다 더 입체적이고 고차원적이다. 거짓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해서, 거짓말을 안 하는 것일 수도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다 거짓말쟁이로 몰 수는 없는 법이다.


그 고전명작 동화가 세상의 90%를 담아내고 정곡을 찌르는 면이 있기에 시대를 넘어 사랑받고 사람들은 손뼉을 치지만, 담아내지 못하는 10%의 세상이 있다. 다시 말해서 정말로 임금님 옷이 보이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진짜로 보이는 것인지, 보인다고 믿는 것인지, 보이는 척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이런 모호함 속에서 미술은 존재한다.


‘임금님 옷’과 ‘별’은 “그것이 거짓이다.”라는 주장에 힘을 실을 때 사용되는 메타포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미술은 그렇게 명확하게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을 소재로 삼지 않는다. 그것을 구분하기 어렵거나 불가능한 것들이 현대미술의 소재이다. 도저히 알 수 없고 신비스러운 것들. 그 이유는 그저 거짓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런 것들이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흥미 있는 화두를 던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언가가 유명해지면 그것을 따라한 사이비가 필연적으로 필수적으로 등장한다. 아주 천연덕스럽고 자연스럽게 자본의 마사지를 받고 더 위용을 갖춰 등장하는 경우도 많다. 그것은 때로는 너무나 조악하고 딱 봐도 임금님 옷이나 별인 것으로 파악이 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진짜보다 더 진짜스럽게 보여서 사람들을 현혹할 때도 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마다 다르게 판단한다는 것이며, 인간의 불완전함은 꽤 자주 가짜를 진짜로 판단하기도 하고 진짜를 가짜로 확신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확증편향’이라고도 한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정확하게 판단할 기준과 근거는 파고 들어가 보면 점점 흐려지고 결국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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