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은 항상 새로움에 대한 강박과 집착이 있는데, 그것에 의해 발전해 온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긴 시간 동안 굳어져온 통념과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시각과 표현방식을 제시하며 미술사의 장면은 전환되어 왔다.
세잔을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추켜세우는 것도 피카소를 불세출의 천재작가로 추앙하는 것도, 그들이 기존의 사고와 시각을 장악했던 관습체계를 부숴버리고 새로운 관점과 방식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말도 세 번 이상 하면 듣기 싫어지는 법이다.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 파괴를 위한 파괴가 난무하는 시대에 그런 것들이 피로해지기도 한다. 어느 순간 어떤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생각들과 이미지들이 또 다른 강요성과 폭력성을 갖게 되기도 한다.
모든 사람들이 같은 정보를 같은 시점에 공유하고 생각이 같다면, 사람들이 새로움을 원할 때는 일괄적으로 새로움을 제공하면 되고, 그 새로움에 피로를 느끼고 지쳤을 때는 진부함으로 돌아가면 된다. 그런데 그럴 수가 있나? 사람들은 각기 다른 정보들을 저마다 다른 시점에 접하고 모두가 생각이 다르다.
이미 기존의 새로움이 지겨워져서 또 다른 새로움을 원하는 사람이 있고, 새로움이 지겨워져서 진부함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고, 그 새로움을 이제야 받아들여서 한창 만끽 중인 사람도 있고, 새로움을 아예 거부하고 기존의 것에 만족하고 그것을 계속적으로 추구하는 사람도 있고, 새로움이 닿지 못해 그냥 예전의 상태에 머물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각자마다 원하는 것이 다른 상태에서, 분위기를 장악하고 트렌드를 이끌며 대중이 눈치를 보고 기호를 맞추게 하는 ‘권력자들’이 존재한다.
패션이나 음악은 같은 정보와 트렌드를 훨씬 더 많은 대중들이 동시에 흡수하고 대규모의 생각들이 동시에 움직인다. 하지만 미술은 그것들에 비해 대중들에게 전달 속도가 훨씬 더 느리고 국부적이다.
결국 미술의 트렌드는 대중에게 수직하방으로 주입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