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리즘’이라는 것은 ‘그냥’, 어떠한 이유도 없는 ‘완벽한 그냥’이라는 것을 더 인위적으로 집요하게, 적극적 극단적 공식적으로 추구해서 예술적으로 학문적으로, 온갖 어렵고 멋있는 표현들을 이용해서 정립해 낸 하나의 사조인 것이다.
미술의 큰 특성 중 하나가 쉬운 것도 어려워 보이게 만들고, 원래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도 모르는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럼으로 인해 더욱 모호하게 만들고 “도대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 하고 질문을 던지게 하고 혼란에 빠지게 한다. 그 혼란의 상태를 사유의 쾌감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미술의 즐거움일 것이다.
도널드 저드와 로버트 모리스는 ‘그냥’이라는 말을, 뻥튀기 기계를 이용해 긴 분량의 말로 확대, 변환하고 있는 것이다. 미술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이다. 대부분 미술가들이 다 그것을 하고 있는 것인데, 그것들은 분명히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들이 무가치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뻥튀기 기계’라는 표현이 부정적 의미로만 읽힌다면, ‘영사기’나 ‘솜사탕 기계’ 등의 표현으로 바꿀 수도 있다.
도날드 저드
로버트 모리스
애드 라인하르트와 프랭크 스텔라는 그것을 조금 더 간결하고 담백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고, 칼 안드레와 솔 르윗은 그것에다가 조금 더 참신한 아이디어를 추가해서 더 설득력 있는 논리와 분위기를 만들어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애드 라인하르트
프랭크 스텔라
미니멀리스트들은 사물의 본질이 ‘그냥’이라는 것을, 집요한 그들 각자의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냥’의 놀라움과 위대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후설의 현상학적 환원과 연결하면 좀 더 철학적으로 깊이가 있어 보이고 근사해 보이는 것이다.
진짜 이유가 안 통하니 가짜 이유를 만들어내야 한다
작가 스타일에 따라 억지로 설명을 만들어내지 않고 “그냥”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는데, 대가급이 아니라면 그것은 보통 굉장히 성의 없어 보이거나 준비 안 된 아마추어의 자세로 받아들여지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무시당하고 평가절하 되지 않기 위해 그럴듯한 스토리를 만들어내야 한다.
원인이 결과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결과에 따른 원인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작가가 된다면 누구도 그러할 수밖에 없다. 작품의 의미와 이유라는 것이 대부분 그런 것이다. 그것을 요구하는 수요에 부응한 각자 방식대로의 최선을 다한 공급인 것이다.
작품의 의미나 이유의 상당 부분은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니 그것에 너무 의존하거나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거나 과하게 집착할 필요는 없다. “아 이 작가는 후 과제를 이 정도로 수행해 냈네.” 하는 정도로 봐도 괜찮다. 그것이 오히려 작품에 대한 더 깊고 정확한 이해일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작품 자체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