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경섭 May 27. 2024

진짜 이유가 궁금해?

진짜 이유는...

그냥


“왜 그것을 하느냐?”, “그것의 의미는 무엇이냐?”


보통 사람들은 ‘왜?’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는 일은 잘 하지 않는다. 모든 일을 다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끔씩 일탈적으로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긴 시간과 노력과 비용을 들인 일로써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술가는 ‘왜?’라는 질문에 대해 제대로 대답할 수 없을지라도 그냥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어도, 스스로는 그것을 왜 하는지 충분히 이해가 가는 것이다. 특히나 추상화나 단색화 작가들은 더욱 그렇다.


권영우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구체적인 말을 할 수가 없고 나는 내가 다루는 작품에 어떤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다. 미술 자체가 시각적인 것이고 거기서 직감적으로 감성과 거래가 되는 그런 데서 시작이 되기 때문에 그 시발은 시초는 극히 단순하다.”라고 했다.


권영우


정상화 역시 “제일 간단한 방법은 ‘이 작가는 그렇게 표현하는구나.’ 그렇게 말한다.”라고 말했다.


정상화


최병소는 “왜 철선 하나만 붕 떠 있는지 그 이유는 나도 모른다. 비평가들은 그 이유를 묻는데 작가들은 그런 거 생각 안 한다. 그냥 하는 거다. 그냥 감으로, 느낌으로. ‘아 저게 작업이 되겠다.’ 싶으면 그냥 해 나가는 거다. 비평가들처럼 논리적으로 따지지 않는다. 비평가들처럼 어떤 생각을 하고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더욱 직접적이고 명쾌하게 이야기했다.


최병소


미술이라는 것은 그저 시각적인 결과물일 뿐인데, 그 이유를 자꾸만 추궁하는 것은 작가들 입장에서는 난감하고 오히려 답답할 수도 있는 것이다. 미술가들에게 작업의 이유를 묻는 것은, “근데 섹스를 왜 하고 싶은 것인데?”하고 성욕의 이유를 묻는 것과도 같을 때가 많다.


‘행위의 무목적성‘, ‘목적 없이 도를 닦는 수양의 결과물’등의 표현은 ‘그냥’이라는 말을 문학적으로 멋있게 표현한 것일 뿐이다.


그 이유가 더 그럴듯하고 멋있다면 오히려 그것이야 말로 만들어진 것일 확률이 높다. 원래 가짜 이유가 더 멋있고 논리적이고 일관성이 있으며, 진짜 이유는 허탈하고 모순적이며 일관성이 없고 말이 안 되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많은 법이다.


미술을 깊이 이해하려고 할 필요 없다. 더 미궁으로 빠질 뿐이고 이해의 대상이 아닌 것을 자꾸 이해하려고 하니까 미술이 난해하다고 하는 것이다.


피카소는 “<게르니카_1937> 속 소와 말이 무엇을 의미하냐?”는 질문에 “소는 소이고, 말은 말이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은 모든 사물들과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의미’를 찾기 원한다. 그것이 우리 시대가 가진 가장 병적인 폐해이다.”라고 했다. 할 말도 별로 없는데 자꾸만 이유를 캐묻는 사람들에게 짜증이 난 것이 틀림없다. 그러고 나서는 대단한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을 조롱하듯, 아무 의미 없는 그림들을 호떡 달인보다도 우사인 볼트보다도 더 빠르게 마구마구 휘리릭 휘리릭 창조해 냈다.


피카소 _ 게르니카


요셉 보이스가 그림을 보는 방법을 토끼에게 설명하지 않았나? 사람들 참 답답하다고. 그냥 보면 된다. 그게 다이다.


죽은 토끼에게 예술에 대해 설명하는 요셉 보이스


프랭크 스텔라가 말한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다.”는 미니멀리즘 사조의 분석에서 좀 더 어려워 보이게 해석해 낼 수도 있지만 결국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작가는 돈키호테일 뿐이고, 잡히지 않는 고래를 잡는 사람이다.”라고도 이야기했다. 표현만 살짝 비틀어서 결국 동어반복을 하고 있는 것이다.


프랭크 스텔라


물론 그런 종류의 미술만 있는 것이 아니고 다양한 종류의 미술이 있다. 하지만 이해의 대상이 아닌 것에 이해를 바랄 때 생기는 문제에 대해서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무언가를 억지로 느끼려고 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예술에서 항상 자기 기준의 어떤 감동을 바란다. 배우에게 자꾸만 노래를 불러달라고 하는 것과도 비슷한 것이다. 영어 선생님에게 수학 문제를 물어보는 것과도 같다.


작품에서 아무것도 안 느껴진다고 좌절할 필요도 전혀 없다. 미술에 대해 20년을 넘게 공부한 나도 사실 거의 대부분의 작품들에서 아무것도 안 느껴진다. 그것은 원래 그런 것이다. 미술은 현실적으로는 그저 암기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필요한 지식 정도 간략하게 파악해 놓으면 그걸로 충분히 하는 것이다. 무언가 숨어 있는 거대한 이데아를 기대할수록 점점 더 미술은 멀어질 것이다. 눈치 빠르게 그것을 파악하고 그저 지식을 입력한 사람들이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그냥'은 무엇인가?

 

‘그냥’은 무엇인가? 아무런 의미도 없고 그렇다면 필요와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치부하고 더 이상 그것이 신경 쓰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것에 사로잡히는 사람들이 있다. 각자의 생각이고 어느 쪽은 맞고 어느 쪽은 틀리다고 할 수 없기에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냥…

그냥.


우리는 왜 태어난 것이냐? 여러 이유와 종교적 이유를 댈 수도 있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이 적용되고 납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저 그냥 태어난 것이다. 이 이유가 가장 수긍이 가는 사람들도 많다. 우리는 왜 사는 것이냐? 그냥 사는 사람들이 있고, 그 이유도 충분히 존중받을 만하고 존재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를 왜 사랑하는가? 여러 가지 이유를 대고 만들어낼 수도 있지만 그냥 사랑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일을 왜 하고 싶은가? 별 다른 이유가 없을 수도 있다. 그냥 하고 싶을 수도 있다. 섹스를 왜 하고 싶은가? 그것이야 말로 그냥 하고 싶은 것이지 않나?


이 ‘그냥’이라는 것만큼 강하고 본질적인 이유도 없으며, 이 ‘그냥’이라는 말만큼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평가절하 되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과소평가되기에 이 ‘그냥’이라는 말을 뻥튀기 기계에 넣고 예술적으로 부풀려낸다. 작품 설명이라는 것은 대부분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은 ‘왜?’라는 질문과 ‘그냥’이라는 대답 사이에서, 끝없이 불만족스러워하며 헤매고 다른 대답을 찾고 만들어내고 결국 제자리로 되돌아오고, 불만족스러우니 또다시 찾고, 그것을 되돌이표처럼 반복하는 일인 것 같다.


‘그냥’의 예술적 변주


작품의 설명이라는 것은 보통, ‘그냥’이라는 것을, 창의적이고 다양한 변주들을 통해 새롭게 문학적으로 시적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다. 미술을 언어로 변환하는 전문가들이 하는 어사무사한 평론의 대부분은 “그냥 했다.”라는 것을 진정 예술적인 문학적 감성과 창조적인 논리들을 동원해 말의 길이를 늘이고 분량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이브 클라인은 자신의 작품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그림이 아니라고 했다. 작품은 그냥 어떤 색과 형태, 질감 등을 지닌 사물이라고 했다. 그것이면 역할을 다 한 것이고, 마치 자연의 요소들이 자기는 무엇이고 무엇을 말하려 한다는 설명이 필요 없듯 그냥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이브 클라인


프란츠 클라인은 “만약 당신이 보고 느끼지 못한다면 나는 당신한테 해 줄 말이 없다.”라고 했다. 대단한 의미는 알아서 찾으시면 되고, 내가 딱히 해줄 말은 없다. 그냥 한 거다.라는 것을 조금 돌려서 말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이 작가도 아까 피카소처럼 자꾸만 이유를 추궁하는 관객에게 짜증이 좀 난 것 같다.


프란츠 클라인


피에르 술라주는 그림이 하나의 이미지나 혹은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언어가 되는 것을 거부한다고 했다. 그리고 어떤 평론가는 그의 작품에 대해 “그의 캔버스는 의미들이 와서 형성되거나 무너지는 장소이고, 색과 형태 또는 구조의 관계들만이 작용하는 공간이다.”라고 했다. 역시 그냥 했다는 것을 조금 더 어렵게 혹은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피에르 술라주


바스키아도 “내 작품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마일스 데이비스에게 ‘당신의 악기는 어떻게 소리가 나나요?’ 하고 묻는 것과 같아요.”라고 했다. 역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바스키아


“그냥 했다.”라고 해서, 작품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작품은 과대평가되거나 과소평가되거나 둘 중에 하나라고 했는데, 지금까지 거론한 예는 미술사에 남는 대가들의 경우이니 아무래도 과대평가된 것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의 가치가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니다. 또한 과소평가되어서 아예 가치가 없는 것으로 책정된 절대다수 나머지 작가의 작품들도 역시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냥 한 것”들은 충분히 어떠한 만큼의 가치가 있다. 예술가들은 그냥 하는 것의 위대함과 놀라움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거품을 잔뜩 넣어 말로 표현해 냈을 때의 결과는 공허함이다. 결국에는 아무런 기억도 남지 않게 되는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