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경섭 May 31. 2024

바나나 한 개를 2억 원에 팔았다고?

바나나는 위대한 예술 작품이 된다


근래에 세계 미술 씬에서 가장 시선을 끌고 논쟁을 불러일으킨 작품은 아마도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코미디언>이 아닐까 싶다.


마우리치오 카텔란 _ 코미디언

2019년도에 있었던 한 아트페어에서 작가는 갤러리 부스 벽면에 바나나 한 개를 테이프로 붙여놨다. 그게 작품의 전부이다. 지나가던 한 예술가가 이게 무슨 작품이냐며 바나나를 떼어내 먹어버렸다. 할 수 없이 작가는 다른 바나나를 다시 붙였다. 그리고 그 작품은 15만 달러(약 2억 원)에 판매되었다.


“이런 것을 예술작품이라고 한다고?”, “황금으로 뜬 바나나도 아니고 어차피 상해 없어질 물건인데 그걸 돈 주고 산다고?” 이런 생각이 드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런 것을 ‘개념미술’이라고 하는데, 작품의 물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작가의 아이디어가 중요한 것이고 작가가 그것을 작품으로 규정하면 작품이 되는 것이다. 마르셀 뒤샹 이후로 현대미술의 가장 핵심적인 포인트가 그 지점이다.


이 간단한 작품과 어이없는 해프닝을 두고, 복잡하고 두꺼운 논쟁은 끝이 없이 펼쳐진다.

나의 식으로 정리하자면, 그냥 피카소의 작품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보면 된다. 작품에 대단한 의미가 있어서 위대한 작품이 되는 것이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위대한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그 능력에 위대함이 있는 것이다. 작품의 핵심은 작품 자체가 아니고 그 이후의 상황이다. 작가도 그것을 노린 것이다.


너무나 대놓고 조롱하듯 도발을 하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탈해하고 분노를 표출한다. 하지만 이렇게 가볍고 풍자적인 작품에서도 그 안에서 심오한 의미를 찾는 사람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작품의 내부에서 의미를 찾으려 하면 더 미궁으로 빠질 뿐이다.


“나의 목표는 최대한 이해할 수 없게 오픈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개방과 폐쇄 사이에는 완벽한 균형이 있어야 한다.” 작가는 이렇게 폼 나는 대전제적인 멘트를 하나 툭 던져놓고 작품에 대한 세세한 설명을 하지는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고 의무도 없다. 그는 대가이기 때문이다. 그 어디에도 명쾌하게 작품의 의미를 설명해 주는 곳은 없다. 여태껏 이야기한 대로 그것을 바라고 요구하는 것이 현대미술에 대한 착각과 좁은 시선인 것이다.

시선을 밖으로 꺼내서, 작품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모습과 일련의 상황을 전체 작품으로 보는 meta적인 시선으로 보자면 나름 흥미롭고 의미가 있는 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이 작품으로 유명해진 작가가 아니다. 그 이전에 다양한 도발적이고 흥미로운 충격적 작품들로 이미 충분히 유명했던 세계적인 대가이다. 그 작품으로 인해 더욱더 욕을 먹으며 아이러니하게도 더욱더 유명해지고 입지를 한 단계 더 올렸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그와 함께 하는 갤러리가 시시한 갤러리 일리가 없다. 당연히 손가락 안에 드는 톱 메이저 갤러리이다.


벽에다 바나나를 붙인 작업이 아니라 더 보잘것없거나 더 이상한 그 어떤 행위를 했어도, 그는 충분히 시선을 끌었을 것이고 스포트라이트와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마우리치오 카텔란’이어서 주목을 받은 것이라면 그가 유명해지기 이전에 처음에 어떻게 주목을 받았냐고 물을 수 있다.










말을 공중에 매달고, 사람을 벽에다 테이프로 붙여놓고, 목매단 아이들 인형을 공중에 달아놓고, 운석에 맞아 쓰러진 교황을 만들었던 (물론 그는 아이디어만 제공하고, 물리적 실행은 조수들이 다 한다.) 전작들을 보면, 그의 기발하고 발칙한 아이디어와 무지막지한 실행력에 대해서는 인정을 안 할 수가 없다.

 

확실히 그는 대단한 사람이기는 하다. 더 확실한 것은, 피카소가 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른 결과적 승자인 것처럼 그도 이 게임의 완벽한 승리자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허탈해하고 더 욕을 하고 분노하고 조롱할수록, 그는 쾌재를 부르며 승리 수당을 마구 챙긴다.

우리가 그의 작품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가 저 위에서 자신의 작품 재료인 우리들의 모습을 미소 띤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충분히 시선을 끌고 질문을 던지게 하고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니 작가와 작품의 미술사적 가치는 거의 확보했다고 본다. 이토록 어처구니없고 재미있는 스토리가 미술 역사에 기록이 안 될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아직 불확실하고 궁금한 한 가지는 그 작품의 경제적 가치이다. 일단 엄청난 가격에 팔았다고는 하는데 그 작품의 자본적 가치가 유지가 될지는 의문이다. 작품을 세 개 만들어서(?) 팔았다고 하는데, 나는 그의 바나나 작품의 자본적 가치가 2021~2022년에 광풍이었던 NFT 작품들과 비슷하다고 본다. 너무나 쉽고 완벽하게 똑같이 무한 복제될 수 있지만 물질적 성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작가가 발부한 보증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그것을 진품 작품으로 인정해 준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NFT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보통은 작품의 미술사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는 비례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 공식이 유지될지가 의문인 것이다. NFT 광풍이 지나가버리고 난 후, 그 해괴하고 혼란스러운 상황과 경험은 역사적 사건으로 남겠지만 작품의 자본적 가치는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작가와 갤러리가 짜고 작품 판매 사기극을 벌인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본다. 데미안 허스트가 다이아몬드를 박은 해골 작품을 가지고, 팔리지도 않았는데 엄청난 가격에 팔았다고 긴 시간 동안 사기극을 벌여왔던 것처럼 말이다.


데미안 허스트


물론 나의 추측일 뿐이다. 이 엄청나게 위대한 개념작품을  2억 원의 작품값을 지불하고 산 컬렉터가 3명이나 된다는 것이 뻥이라는 것을 나는 증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2개는 12만 달러(약 1억 5천만 원)에 팔리고 마지막 한 개는 해프닝을 겪으며 가격이 올라 15만 달러(약 2억 원)에 팔렸다고 한다.}


작품 판매가 진짜 사실일 수 있는 가능성도 농후하다. 그 수많은 NFT 작품을 사는 사람들도 실제로 존재한다. 하물며 이 작품은 세계적인 대가가 보증하는 작품이다. 이것만 사면 안 된다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작품 판매의 진실과 이 작품의 자본적 가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선명해질 것이다. 중간에 몇 번 작품의 가격이 더 올라서 팔렸다는 기사가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데미안 허스트가 그랬던 것처럼 그저 페이크일 수도 있기 때문에 좀 더 침착하게 더 길게 지켜봐야 한다. 궁금하지만 너무 조급해하지는 말자. 나는 나의 추측이 맞는지 지켜볼 뿐이다.


하지만 실체적 진실이 완벽하게 밝혀진다는 보장은 없기에 결국 또 미술은 안개에 싸이고 만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