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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섭 Jun 03. 2024

예술가와 사기꾼 사이에는 경계선이 없다


사기란 무엇인가?


현대미술과 예술가를 보며 “이건 사기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많이들 해봤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선은 현재에도 존재하고 앞으로도 쭉 있을 것이다. 


백남준 또한 “예술은 사기다.”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그가 말한 바의 의도와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전체의 문맥 속에서 그 부분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보고, 그가 그런 표면적 표현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심층의 본질적 의미는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귀찮고 어렵고, 많은 사람들은 맥락은 상관치 않고 그 부분만 딱 잘라내서 자기 이해하기 편하게 받아들인다.

 

우리는 말로 규정되는 것에 때로 너무 휘둘리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해본다. 본질은 따로 있고 그것이 표현되는 방식은 다양할 텐데 표현하는 방식에 따라서 본질이 휘청거리기도 하는 것이다. 


‘사기’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을 현혹하여 피해를 보게 하고 범죄적인 이익을 취하고 감옥에 가야 하는 위법을 떠올릴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무언가 찜찜하고 동의할 수 없는 말을 천연덕스럽게 하는 사람을 떠올릴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사랑의 사기꾼’처럼 그나마 귀엽게 봐주고 넘길 수 있는 정도로, 은유적인 표현 정도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랑의 사기꾼’이라는 것도 어떤 사람은 제비족이나 꽃뱀 같은 도둑들이나 여러 사람을 동시에 만나며 상대를 희롱하고 농락하는 사람을 떠올릴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능청스럽고 뻔뻔스럽게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매력남에게 농담조로 붙이는 표현 정도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렇게 이 단어의 해석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그리고 매우 이율배반적이다. “예술은 사기다.”라는 표현 또한 굉장히 다양하고 주관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애매한 공간을 품고 있다. 법률적 범죄와 문학적 표현 사이 어딘가에 있고, 예술이라는 것의 복잡성은 그 넓은 스펙트럼을 충분히 다 포함할 수 있을 만큼 광역적인 것이다. 충분히 그렇게 표현할 수 있고 제각기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다. 딱 한정 지어서 좁은 의미로 규정지을 수가 없고, 그것을 완벽하게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특성을 또한 갖고 있다. 


사기꾼의 단계


하수는 사기를 당한 사람이 원한을 가지도록 사기를 치는 사람이고

중수는 사기꾼에게 원한을 갖지 않도록 사기를 치는 사람이고

고수는 사기를 당한 사람이 자신이 사기를 당한 사실조차 모르도록 사기를 치는 사람이라고 한다. 


다음 단계인 초고수는 사기를 당한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참 좋은 사람이라는 평을 듣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여기저기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의 평판에 집착하고 그것이 절대적인 정보인 양 여기는 분위기에 대한 반감이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불완전성은, 어떤 사람이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마녀사냥 식으로 죽일 놈으로 만들거나, 일상 속의 천재적 배우를 참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실수를 자주 범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보다도 더 위의 단계가 있다. 나는 이것을 ‘하이엔드 고수’라고 칭하는데, 초고수를 넘어서서 위인의 반열로 올라가는 사람들이다. 모든 위인이 다 사기꾼이라는 것은 아니다. 단지 위인 중에는 사기꾼도 섞여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초고수서부터는 사기의 수준이 예술적 수준인 것이다. 이 단계로 가면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이 무너지고 몽롱해지며, 그 어떤 것도 완벽하게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주장하는 에너지와 믿음만이 존재하는 단계이다.


멋지게 속여 달라


진실이란 무엇인가? 진실이라는 것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속인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서 속이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몽롱해지고 모호해지는 지점이 존재한다. 그 지점에 예술이 위치한다. 단순하게 평면적으로 생각하자면 간단하지만, 파고 들어가면 끝이 없는 나락과 같다. 


살다가 어느 순간, “피해의식이 과해져서 내가 세상을 너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각박하게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뭐 좀 속아줄 수도 있는 것이지. 그렇게 속아준다고 해서 나에게 큰 해가 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속는 것이 더 행복해지는 것일 텐데.” 하고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름다운 속임수, 사랑, 예술, 알면서도 속고, 더 속기를 원하고 멋있게 참신하게 속기를 바라기도 한다. 


예전에 남녀문제에 대해서 상담하는 어떤 라디오 방송에서 남성 혐오론자인 듯한 청취자가, “남자들의 호의에 절대로 속으면 안 된다!”라고 눈을 부릅뜨고 진지하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분의 어떤 특수한 상처받은 경험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뭘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적대적으로 꽁꽁 싸맬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그래서, 잘 싸매고 속지 않으면 행복해지는 것인가? 사랑의 사기에 한 번도 속지 않고 한 번도 피해를 보지 않은 사람과, 온 열정을 다해 속고 상처받고 시린 기억이 있는 사람 중 누가 더 불행한 사람인 것인가?


서로 우아하게 (때로는 아주 추악하고 치사하게)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면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그런 것이 사랑이고 삶일 텐데, 때로는 속아주기도 하고 더 속기를 바랄 때도 있지 않은가? 예술도 마찬가지이다. 경계심만 가지고 볼 것이 아니라, “오냐 너에게 한 번 속아주마. 대신 좀 참신하게 재미있게 속여 달라.” 하고 대한다면 좀 더 인생이 다채로워지고 흥미로워질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끝도 없이 속을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각자 저마다의 기준이 있다. 한 없이 끝까지 속아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피해가 직접적이거나 감당하기에 버거운 수준의 스트레스가 느껴진다면 거부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아무리 마음을 열려 해도 내 마음을 주고 싶지 않다면 억지로 그래야 할 의무도 없다. 각자의 기준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다 엄밀히 따지면 일관성이 없고 모순적인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날로 먹는 스타일의 대가들의 작품을 보면, 그들의 말이나 작품을 찬양하는 평론을 듣고 있으면 유쾌하게 속지를 못하겠다. 끝내 부아가 치밀고 나로서는 받아들이기가 싫은 것이다. 그렇다고 단색화 내지는 미니멀리즘으로 불리는 그런 류의 작품들을 모두 싫어하는 것은 또 아니다. 윤형근이나 최병소의 작품은 또 좋아한다. 또한 이강소의 회화작품은 싫어하지만 그의 지나간 퍼포먼스 예술은 좋아한다.

 

그 이유를 말로 나름대로 설명을 할 수는 있지만, 여태껏 많이 한 것도 같고 더이상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것은 나만의 기준이자 이유이고 따지고 들면 그 안에 논리의 모순이 있을 테고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테니까. 


중요한 것은 자기의 기준과 생각이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남들의 그것에 억지로 맞출 필요가 없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기준을 강요하는 것도 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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