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봄 Sep 25. 2023

독일의 가을, 한국의 가을

아침에 손이 건조해서 핸드크림을 바르다 문득, 

아, 이제 건조한 계절이 되었구나. 가을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창밖을 바라보니 커다란 나무가 어느새 짙은 색을 뿜고 있고, 발콘의 국화는 향이 진하다.


가을이다.


한국의 가을은 늘 노랗고, 붉고, 알록달록에 파아란 하늘이라, 급하게 나서는 출근길에도 문득 아파트 단지내 나무들의 색을 보며 가을이 왔구나-를 느낄 일이 많았는데,

독일은 단풍이 많이 않아 햇살이 길어지고 깊어지는 것, 그리고 건조하고 추워지는 것으로 가을을 느끼곤 한다.


늘 독일의 가을이 길고 긴 겨울의 초입인 것 같아 싫었는데, 2년 전 아직 돌도 안된 아기를 데리고 온 동네를 2시간씩 매일 산책하다보니 독일의 가을을 한껏 느낄 수 있었고, 그 나름의 아름다움을 발견해 다시 좋아하게 되었다.


하지만 30년 넘게 살았던 내 고향이 한국이라, 아름다운 독일의 가을을 봐도 한국의 가을이 그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가을이면 설악산으로 단풍구경 가던 일, 햇빛이 진해지고 길어져 황금빛으로 빛나는 초저녁이면 엄마와 집 앞 산책로를 걷다 들어가던 일, 전어가 제철이라며 회, 구이도 먹으러 다니고, 놀러다니기 딱 좋은 날씨라며 서울 근교 여기저기 열심히 알아보고 놀러다니던 일, 가본 수목원 중 가장 예쁘게 꾸며져있었던 화담숲의 가을 전경, 어느 가을 엄마와 둘만 했던 여행에서 순천만 정원 방문...그 곳에서 좋아하는 꽃을 맘껏 보고 습지도 걸었던게 참 좋았다. 그냥 별거 안해도 매 순간이 좋았고, 열심히 검색해 찾은 여수의 숙소를 엄마가 너무 맘에 들어해서 기분이 너무 좋았다. 내가 엄마에게 저런 기쁨을 주고, 여기서 며칠 더 머무르고 싶다며 아련하게 행복한 웃음을 짓는 엄마를 보며 찡하기까지 했었다. 통영에서 맛본 굴은 생애 먹어본 굴 중 가장 신선하고 맛있었고,  통영 조각공원에서 배깔고 누워 딩굴거리며 친한 언니와 나누던 수다, 천고마비의 계절이라며 동생들이랑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원없이 먹고 또 먹던 그 시절- 

내가 미취학 아동이던 시절에는 엄마아빠가 주말이면 늘 나를 데리고 산으로 바다로 놀러다녔고, 캠핑도 참 많이 다녔는데, 그러기 좋은 꽃같은 계절은 늘 가을이었다.

경기도 안성에 전원주택하던 시절에는 가족들이 다 같이 둘러앉아 살짝 차가운 공기에 옷을 걸쳐 입고는 둥그렇게 둘러앉아 아빠가 땅에 불피워 구워주는 고구마 호호 불며 먹고 별것도 아닌 얘기에 함께 웃고 하던 기억들이 나에겐 한국의 가을이다.


이 곳에 와서 내가 한국에 살았던 시간의 1/4도 안되는 시간을 살았으니, 여기가 복지가 좋고 공기가 좋고 어쩌고 해도 나에게 한국만큼의 향수와 정감을 주지는 못하는게 당연한 얘기겠지.

남한보다 4배나 넓은 독일 땅이라 이 곳에도 철마다 놀러갈만한 예쁜 도시, 공간들이 참 많지만 그 어떤 예쁜 곳에 가도 한국의 이름모를 평범한 시골 풍경만큼도 나를 편안하게 하진 못한다. 

정말 멋진 6성급 호텔에서 최고급 요리를 먹는데 혼자 먹는다면 그게 무슨 재미고 호사일까.

가끔 독일에 사는것이 그런 느낌일때가 있다. 허울좋은 유럽이라는 호사같은...

정작 나는 그냥 어디 한국 시골의 평범한 논을 배경삼아 사랑하는 가족들과 평상에 앉아 낮에 다같이 산에 가서 주워온 밤을 구워 나눠먹으며 딩굴대고 수다하며 웃는게 더 하고싶은 사람인 것을-


예전에는 엄마아빠가 늙어서 서울 근교 전원에 집짓고 땅밟고 살고싶다고 하는게 고리타분한 얘기라고 생각했고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직 도시의 문명이 좋았고 늘 즐길거리가 있고 시끄러운 서울이 좋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 마음이 이해가 되는 걸 보면 나도 확실히 나이를 먹고 있는 것 같다. 


그리운 한국의 가을을 보러 조만간 떠나려 한다. 

많이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내 머릿 속의 상념들을 좀 정리하고 돌아와야지...

오랜만에 느끼는 설렘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주말 일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