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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가연 Apr 21. 2022

미술관 파고들기, 문화재단 해킹하기

신진 건축 비평, 기획자로 커리어를 시작하는 방법

나는 자기소개를 극도로 싫어한다. '나'로 시작해서 자아가 과잉된 글쓰기는 좋지 않은 버릇임을 알면서도 첫 문장을 '나는 자기소개를 극도로 싫어한다'고 밝히고 싶을 만큼 자기소개를 싫어한다. 자기소개는 자기 자신이 잘 정립된 사람에게나 유쾌할 일이다. 깔끔한 이력과 멀끔한 미래를 갖춘 사람이라면 자기소개가 불편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의 직업으로 자신을 정의하면 되니까. <3년차 건축가>, <시각예술 독립 기획자>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리저리 구르면서 되는 대로 살아가는 나는 자기소개가 아주 불편하다. 나는 연차도 전문성도 없이 연구인지 창작인지 아니면 기획인지 모르는 무엇을 겨우 해낸다. 우리 어머니는 당신의 지인에게 나를 이렇게 소개한다. "저희 딸은 놀아요." 어머니가 얄밉지만 이해는 간다. 차라리 논다고 하는 편이 나은 설명일 정도로 내 일은 중구난방이다.


자기소개가 엉망진창이 된 사연을 풀어놓기 위해서는 몇 줄 되지 않는 이력과 직업적 방향성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어릴 적부터 미술관과 책이 그저 좋았다. 전시공간의 텁텁한 공기와 활자의 따끈한 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건축 기획과 비평을 하고 싶답시고 나서기 시작했다. 학부 졸업을 앞두고 1년 정도 어중간한 시기가 생겼는데 시간과 관심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런저런 프로젝트에 말려들갔다. 사실 고졸을 거두어주는 미술관, 출판사는 잘 없고, 개중 건축 전공자를 원하는 곳은 더 없기 때문에 아는 사람들이 물고 들어와준 이런 저런 독립 프로젝트에 말려들어가기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일했다. 2021년 3월부터 2022년 3월 사이에 책을 한 권 만들었고, 전시에 작업을 하나 출품했고, 비평 하나와 에세이 하나를 기고했고, 하나의 워크숍-창작 프로젝트를 운영했고, 기록집을 하나 만들었고, 예술인 대상 교육을 하나 들었고, 전시를 하나 기획했다. 이 전시에서는 인력과 예산이 부족해서 광고물도, 전시공간 일부 디자인도, 후도록 집필도, 전시 운영과 설치도 다른 기획자와 직접 했다. 추상적 단어만 늘어놓으니 그럴 듯 하지만 결과물의 실상은 민망스러울 정도의 수준이다.


이 프로젝트들은 출판을 제외하고 전부 관 주도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금전적 지원을 받았기에 진행할 수 있었다. 그 덕에 내 돈을 쓰지는 않았으나 수입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러면서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한 다양한 분야의 예술인을 장르 불문하고 만날 수 있었다. 건축 바깥의 사람들을 만나본 게 어쩌면 최고의 성과였다. 시각, 전통, 음악, 연극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인과 아주 잠깐씩이라도 대화를 나누었다. (물론 프로그램 상에서 건축계 종사자는 한 명도 못 만났다.)장르별로 다들 특성이 있었는데 개중에는 기획하는 사람들이 제일 무섭다. 특히 큐레이션과 비평을 같이 한다면 정말 무섭다. 사람이 매정하거나 섬뜩하진 않지만 어려운 말을 어찌나 물흐르듯 하던지. 말을 너무 잘 하고 글도 잘 쓰고 당당해 보였다.


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그들에게는 성공적인 기획자를 향한 바른 길이 있어 보였다. 지향하는 지점이 있다면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규율이 있고 거기에 맞추어 커리어를 한발짝씩 쌓아나가는 중으로 보였다. 지원사업을 넣고, 이력을 쌓고, 기획자로 성장하며 조금씩 전시의 판을 키우고, 동년배 작가들과 교류하고, 어떤 독립지에 기고하고, 비평상에 글을 보내고... 그들은 꼭 봐야하는 전시와 요즈음 괜찮은 갤러리를 알았다. 경쟁은 치열하고 개중 능력 있는 사람도 너무 많지만 적어도 순수 예술 분야에는 그런 길이 있었다. 이름 없는 갤러리에서 시작해서 단계를 밟고 올라가는 방법이 있었다. 비록 그 과정은 고되고, 경쟁 또한 치열하단 점은 안타깝다.


경쟁하는 방법조차, 두고 싸울 자리가 있는지조차, 나의 지향점조차 모르는 건축 나부랭이는 경쟁 조차 부러웠다. 그때 나는 아는 게 없었고 지금도 아는 게 없다. 건축으로 기획하는 선배는 너무 멀고 동년배는 너무 가까워서 그 거리가 결코 건너지 못할 심연처럼  느껴진다. 물론 다른 예술인들은 건축사 사무소에 취업하면 관련 분야에서 일하면서 경력을 단절시키지 않고 경제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건축학과 학위를 부러워하긴 했다.


건축을 베이스로는 작은 기획을 하기가 참 애매하다. 그래서 '되는 대로' 기획서를 쓴다. 사실 연구지원, 창작지원, 출판지원, 심지어는 메타버스 지원까지 신청 가능한 게 건축이다. 신청은 가능하다. 지원이 없으면 활동이 힘든 것은 사실이다. 역사적, 전통적으로 모든 예술 뒤에는 지지해주는 사람과 그의 돈이 있어왔다. 그런데 건축 활동에 적합한 지원사업이 잘 없다. 시스템마다 차이가 있지만 지원사업 신청시의 분류에 건축가가 없는 경우도 있다. 서울문화재단에 지원사업 넣을 때는 '시각예술'과 '기타'사이에 고민하다가 후자로 넣었다. 그게 참 웃겼다. 건축은 삶을 담는 그릇이니, 종합예술이니 하는 모든 수사가 '기타'로 함축되는 형국이라니. 당장 다음 달에는 또 어떤 일을 해야 하나?


오늘은 책의 해 청년독서활동지원사업 사업신청서를 썼다. 내일은 프로젝트 해시태그 신청서를 마무리하는 날이다. 취준생이랑 내가 다른 게 뭔가. 마지막 남아 있는 창조성도 e나라도움과 스카스에 탈탈 털릴 것 같다. (그리고 이 글을 퇴고하는 지금, 다 떨어졌다. 아니 2022년 4월까지 신청한 모든 지원사업 및 교육에 떨어졌다. 이럴수가...)


건축 전시에, 건축 비평에 미래를 바란다면 지원이 있어야 한다. 아무런 도움 없이 성장하는 사람은 없다. 자리가 없다면 성장할 수도 없다.


2021년도에 제출한 자기소개들을 읽어 보았는데 고작 1년의 기간 안이지만 소개가 계속 바뀐다. 이게 다 프로젝트의 성격에 맞추어 자아를 교정해서 그렇다. 그동안의 비공식적인 자기소개에서는 시키는 거 다 한다고 그랬는데, 앞으로는 나를 건축 기반의 무엇이라고 소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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