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끝자락에서 그가 물었다.
요 며칠 계속 내린 비 때문인지 가게 안 공기까지 촉촉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마감 준비를 위해 창문 블라인드를 내리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의 세상엔 노랗고 빨간 조명 불빛들로 가득하다. 빛나는 주말 저녁의 거리에 색색깔의 우산을 쓴 사람들이 오고 가는 풍경을 바라보다가 잠시 정신을 잃었다.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걸까?' 갑자기 술에 취한 듯 몽롱한 느낌이 든다. 선물가게를 시작한 이후로는 거의 하루 종일 가게 안에만 있어서인지 비가 오면 부쩍 우울한 생각이 스며든다. 우리 가게에 오는 손님 대부분은 연인에게 줄 선물을 사러 오는 사람들이다. 그 어떤 기념일도 아닌 평범한 하루를 조금 특별하게 만들어줄 만한 작은 선물을 찾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사랑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저마다 어울리는 선물을 추천해준다. 가장 인기 있는 물건은 작은 인테리어 소품들과 스와질 캔들이다. 아로마 오일이 들어간 소이 캔들도 있지만 타서 없어져버리기 때문인지 원래 모양이 그대로 남는 스와질 캔들을 사가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을만한 것들을 주고 싶어 한다. 언젠가 시들어버릴지도 모를 사랑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영원하기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시계가 9시를 가리키자 간판에 불을 끄고 아델의 Make you feel my love를 틀었다. 마감 준비를 할 때면 항상 이 노래부터 플레이한다. 빌리 조엘이 부른 것도 좋아하지만 어쩐지 이 시간엔 아델의 목소리로 듣는 노래가 더 감미롭게 와 닿는다. 비가 와서 매출이 좋지 않지만 가게를 몇 년째 운영하다 보니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일희일비해서는 가게를 꾸려가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정산을 마치고 매출장부에 간단하게 특이사항을 메모한 뒤 청소를 시작한다. 10평짜리 작은 가게지만 작은 소품이 많아 구석구석 조심스럽게 청소해야 한다. 내일은 가게가 쉬는 월요일이다. 비록 일주일에 하루지만 그 하루 동안 뭘 하면서 보낼지 상상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시네마테크에서 스페인 영화를 상영한다고 하던데, 거기나 가볼까?' 평일이라 일반 영화관에 가도 사람들이 별로 없지만, 아무래도 혼자는 어색하다. 그런데 시네마테크에 가면 대부분이 혼자 온 사람들이라, 각자 따로 앉아 있는 사람들이 모두 '같은 무리'라는 느낌이 공기 중에 가득하다. 애인이 있었다면 수목원에 가자고 했겠지만 그게 누구든 평일 낮에 만나자고 불러내기는 어렵다. 그래서 월요일엔 항상 혼자다. 일주일에 하루, 온전히 혼자 보낼 수 있는 시간이지만, 가끔은 누군가가 불쑥 내 시간에 끼어들어와 주길 바라고 있다.
청소까지 마치고 보니 벌써 9시 반이 넘었다. 매일 30분을 목표로 서두르지만 여간해서는 쉽지 않다. 꼼꼼해서라기보다는 손이 느려서라고 생각한다. 모든 행동이 느린 편이지만 반대로 마음은 급하다는 게 그나마 나를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도록 균형을 맞춰준다. 가게 조명을 모두 끄고 세상 밖으로 나서는 순간, 첫 숨에 들어온 공기가 시원하다. 끝을 알 수 없었던 더위를 데려가는 빗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진다. 우산을 펼치고 거리로 나선다. 오늘은 길 건너 포장마차에서 우동 한 그릇 먹고 들어갈 생각이다.
비 오는 날의 포장마차 안은 희뿌연 필터를 낀 것처럼 보인다. 가끔 오는 곳이지만 사람을 잘 알아보는 아주머니가 기분 좋게 맞아준다.
"어~ 이쁜 아가씨 왔네. 뭐 뜨끈한 거 줄까?"
"네. 오랜만에 우동 한 그릇 먹고 갈려고요."
잠시 후, 호로록 거리며 우동 면발을 밀어 넣고 있는데 누군가 쳐다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조금 떨어진 자리에 얼굴을 아는 손님이 앉아 있었다. 한동안 우리 가게에 자주 오던 남자다. 요즘 뜸하다 싶었는데 황금 같은 일요일 저녁에 혼자 있는 걸 보니 그새 여자 친구와 헤어진 모양이다.
'차인 걸까?' 나도 모르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눈이 딱 마주쳤다. 내 생각을 들킨 것 같아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불편하고 어색한 합석을 하게 되었다. '눈치가 없군.' 이 남자는 분명 차였을 거라고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동안 우리 가게에서 보았던 모습-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선물을 고르는 태도-에서는 분명한 행복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데 왜 헤어진 걸까. 이별의 이유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는 느리고 낮은 톤의 목소리로 자기 이야기를 했다. 모든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과정이야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는 여자에게 차인 게 맞았다. 한 가지 예상 밖이었던 건 애인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좋아하던 여자에게 차였다는 사실뿐이었다.
"에이, 뭐 그럴 수도 있죠."
아무 의미 없는 말이 위로인 양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말 상대를 해주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우동만 먹고 빨리 집에 가서 쉬려고 했던 계획이 무너지고 있었다. 11시가 넘어가자 포장마차 안의 사람들이 전부 새로운 얼굴로 채워졌다.
"내일 월요일인데 출근 안 하세요? 이제 그만 일어날까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본 남자는 핸드폰을 확인하더니, 역시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얼마나 말할 상대가 없었으면 나를 붙들고 이런 하소연이나 할까 싶어서 측은한 마음이 들었지만, 아무 의미 없이 감정의 씨앗을 흘리고 다녀서는 안 된다는 걸 상기하고는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밖에는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다시 우산을 펼치고 빗물을 깊게 머금은 길 위에 섰다.
"그럼 조심히 가세요."
가볍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뒤돌아서는데 그가 다시 불러 세웠다.
"왜요?"
자기가 불러놓고도 한동안 말없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 역시 생각과 행동 모두 느린 사람이다. 답답한 걸 못 견디는 내가 다시 한번 말을 재촉했다.
"왜 그러시는데요?"
내 말투에 약간의 짜증이 섞여 나왔지만, 그래도 그는 자기가 하려던 말을 꺼냈다.
"우리... 비 그치면 같이 산책할래요?"
"네? 뭐라고요?"
뜻밖의 말에 자동적으로 반문이 튀어나왔다.
"비 그치면 같이 산책하자고요."
그는 다시 한번 천천히 말했고,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망설여졌다.
...
"우리... 비 그치면 같이 산책할래요?"
여름의 끝자락에서 그가 물었다. 제법 로맨틱한 데이트 신청이었지만,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맡겨둘 생각이다. 그에게는 아직 연인보다 친구가 필요하다. 그리고 내일은 오직 나만을 위한 하루가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