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없는 설움

by 자유지은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제주로 오면서 가지고 온 짐이라고는 달랑 기 내용 트렁크 하나뿐이다. 서울에서도 자취를 오래 했기 때문에 짐이 꽤 많았지만 다행히 미혼 동생이 있어 살림살이를 다 주고 왔다. 취미 로 가끔씩 치던 야마하 디지털피아노가 눈에 밟히긴 했지만, 중고로 팔아버리기보다는 동생한테 주는 게 여러모로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곤란한 물건은 책이었는데, 서울에서도 이사를 할 때마다 책 때문에 힘들던 기억이 번뜩 났다. 책처럼 가져갈 엄두도 나지 않고 버 릴 수도 없는 물건은 또 있었다. 이를테면 졸업앨범이나 노트같이 개 인적인 물건. 이 많은 걸 제주까지 전부 싸들고 내려가자니 당장 필요 한 물건도 아닌데 너무 무겁고 자리만 차지할 것 같았다. 그래서 디지 털피아노를 비롯해 각종 가전제품과 살림살이, 책을 모두 동생에게 양도(?)하고, 그 대신 당장 가져가지 못하는 짐을 맡아달라고 했다.


만약 동생이 없었다면 가전제품은 중고매장에 팔고, 자잘한 살림 살이는 버리거나 자취하는 친구에게 주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을 까? 아주 고가의 물건이 많다면 또 모르겠지만, 자취생에게 그렇게 비싼 물건이 있을 리 만무하다. 제주도로 이사하는 업체가 있기는 하 지만 기본 단가부터 다르기 때문에 어지간한 물건이라면 화물택배 로 보내거나 우체국 택배를 이용하는 게 경비를 절약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나는 서울에서 계속 일하느라 집도 구하지 못한 채 내려와 버렸다. 서울에서 제주로 발령이 나면서 말미가 전혀 없이 일하게 된 탓이다. 이사는커녕 당장 몸을 위탁할 곳을 찾기에도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관광 비수기인 겨울철이라 숙박업체는 여유가 있었다. 제주에 내려오기 며칠 전에 급하게 예약한 숙소는 서귀포에 있 는 한 게스트하우스였다. 하루에 2만 5천 원. 네 명이 함께 사용하는 방에 샤워실과 화장대, 개인 사물함이 있었다. 비교적 깔끔하게 되어 있어서 며칠 동안 묵었는데 비수기라 그랬는지 한 번도 네 명이 가득 차는 걸 보지 못했다. 그래서 집을 구할 때까지 머물려고 주인장에게 문의했더니, 다음 주부터는 단체 예약이 있어서 어렵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임시숙소를 옮겨야 했다. 다행히 서귀포 시내권에 게스트하 우스가 많이 있어 다른 숙소를 구하는 게 별로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여행용 트렁크를 끌고 새로운 숙소까지 가는 동안 내 몸을 휘어 감듯 거칠게 몰아치던 찬바람이 매몰차게 느껴졌다






새로 구한 숙소는 서귀포 시내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시장 안에 있어서 집을 알아보러 다니거나 현지 정보를 얻기에 좋아 보였다. 나 름 오랜 역사가 있는 게스트하우스로, 오래된 만큼 인테리어나 시설 1: 제주 입성 신고식! 한겨울의 집구하기 대장정 23 이 좋지는 않았지만 가격이 5천 원 저렴하고 방이 여러 개 있어서 집 을 구할 때까지 장기간 지낼 수 있었다. 이렇게 한 달 정도 게스트하 우스를 임시숙소로 사용하는 데 숙박비만 60만 원 정도 들었다.


그 당시 나에게 가장 필요한 건 무엇이었을까? ‘의식주’로 구분해 서 말하자면 옷은 들고 간 가방에 있는 것으로도 충분했고, 밥은 매 끼를 사 먹는다고 해도 입에 맞지 않는 외국음식이 아니라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집은 차원이 달랐다.


20141126_203858(20시38분).jpg


보통 파트타임 근무는 오전 오후 근무자가 따로 나뉘어 있는 경우 가 많지만 스타벅스는 매주 스케줄이 바뀌는 시스템이다. 그러니 당 연히 내가 일하는 시간도 정해져 있지 않다. 어떤 날은 아침 일찍 가 서 낮에 퇴근하고, 또 어떤 날은 오후에 가서 밤에 퇴근한다.


문제는 밤에 퇴근하는 날이 주말인 경우다. 비수기라 평일에는 4 인실을 거의 혼자 쓰다시피 할 정도로 투숙객이 없었지만 주말에는 사정이 달랐다. 내가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시간이면 같은 방에 있는 사람들 모두 불을 끄고 누워 있었다. 갈아입을 옷을 챙기고 샤워를 하 자니 나 때문에 시끄러워서 다들 잠이 깰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샤 워는 포기하고, 조심스럽게 세수와 양치질만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에도 같은 시간에 끝났는데, 전날과 똑같은 상황일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제대로 씻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편을 겪기도 싫었지 만, 모르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게 더 싫었다. 그래서 일하던 곳의 개수대에서 대충 세수를 했는데, 옆에 있던 직원이 그런 나를 보더니 물었다.


"왜 여기에서 세수를 해요?”

제주도가 고향인 그녀는 의아하다는 듯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나 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내 행동이 이상하 게 보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아……. 아직 집을 못 구해서 게스트하우스에 있는데 지금 이 시 간에 들어가면 다들 자고 있거든요. 제가 가서 씻으면 사람들이 깨잖아요. 그래서.”

다행히 그녀는 내 말뜻을 금방 이해해줬다. 그런데 그 뒤에 따라붙 은 말이 내 마음을 툭 건드렸다.

“아이고……. 불편하겠다. 어떡해…….”

별 거 아닌 몇 마디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토록 원하던 제 주에 왔는데 집을 구하지 못해 이러고 있어야 한다는 게 서러웠다. 마 치 만화 속의 ‘캔디’가 “울면 안 돼”를 외치며 꾹꾹 참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서 “괜찮니? 힘들었겠다” 하며 따뜻하게 안아주는 기분이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제주에 내려와서 집도 절도 없이 공중에 붕 뜬 상태로 일하고 집을 구하러 다니던 나날은 차디찬 겨울바람만큼이 나 쓰라리고 외로운 시간이었다. 단 한 번밖에 울지 않은 내가 대견스러울 정도로.


IMG_20160927_130614(13시06분).jpg






나는 이 일을 계기로 집이 가지는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해봤다. 집 은 단순히 잠만 자는 물리적인 휴식 공간만이 아니라, 타인과 나를 분 리하고 정신적인 안정을 찾는 ‘마음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 람들은 함께 사는 가족 사이에서도 ‘자기만의 방’을 고집하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그동안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집 없는 설움’을 리얼 하게 체험한 것을 계기로, 더 간절하고 부지런하게 집을 구하기 시작했다.



keyword
이전 03화서울을 떠난다는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