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 내려와서 집을 구하기까지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그래서 더욱더 빨리 집을 구해 안정을 찾고 싶었지만 제주에서 집을 구한다는 건 대도시에서보다 훨씬 복잡하고 힘든 일이었다. 물론 내가 살던 서울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집을 구하고자 했을 때는 대략 중요하게 생각하는 조건이 있게 마련이고, 그것들을 충족하는 집을 얻는다는 건 정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돈이 많다면야 애초에 이런 고생을 할 필요도 없이 내 마음에 드는 집을 짓거나 마음에 드는 집을 떡하니 사면되겠지만, 가난한 30대 초반의 내게 그런 것은 허황된 꿈일 뿐이었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는 최대한 현실적으로 생각해서 허황된 조건은 배재했다.
우선 내가 원하는 집의 조건은 이랬다.
첫 번째, 혼자지만 방 2개 있는 집
두 번째, 바다에서 가까운 집 (걸어갈 수 있는 정도라면 OK)
세 번째, 층간소음이 없는 집
이밖에 부수적으로 체크할 사항으로는 보일러가 가스인지 기름인지 여부, 마당의 유무 정도였다.
집을 알아보기 위해서 부동산에 찾아가느냐? 그건 집 '매매'일 때 얘기고, 보통 집을 '임대'하려면 부동산보다는 오일장신문을 먼저 뒤져야 한다. 이 오일장신문은 지역별로 서귀포오일장신문과 제주시 오일장신문 2종류로 발행되는데, 신문이 배포되기 전날부터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었다.
서울은 인터넷 직거래나 어플이 활발히 이용되고 있고, 부동산에 가도 집을 구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지만, 제주도는 토지 매매나 아파트 매매 같은 '큰 거래'가 아니면 대부분 오일장신문을 통해 집을 내놓고 계약이 이루어진다. 또 어떤 집들은 이런 신문에도 내지 않고 집 앞에 '임대문의 010-XXXX-XXXX' 하고 적어놓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까 직접 발로 뛰지 않으면 '나온 집'을 발견하지 못해 진짜 좋은 집을 놓치는 경우도 생긴다.
나는 일단 오일장신문을 보면서 조건이 맞는 방 2개짜리 집을 다 보러 다녔다. 그런데 어찌나 집이 초스피드로 나가는지, 아침 8시에 전화해서 택시를 타고 집을 보러 갔더니 '방금 전에' 집이 나갔다고 하질 않나, 내가 집을 둘러보며 고민하는 동안 바로 뒤에 온 사람이 당장 그자리에서 계약을 하겠다고 말하는 바람에 코앞에서 괜찮은 집을 놓치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집을 빨리 구하지 못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막상 집을 보러 가면 선뜻 계약할 만큼 마음에 드는 집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주 물정을 잘 모르는 내 입장에서는 이것저것 걸리는 게 너무 많아서 고민하고 타협할 마음조차 안 생기는 집들도 태반이었다.
'방 2개, 거실 겸 부엌'이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서울 집들의 이미지가 있다. 그런데 직접 가서 보면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집을 보게 된다. 무엇을 상상하든 정말 180도 다르고 황망하기까지한 집도 목격하게 되었다. 이런저런 일들이 수차례 반복되면서 점점 집을 보러 다닐 맛이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어정쩡한 상태로 집도 없이 지낼 수는 없었기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집을 구하는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안 빠지는 집들은 계속해서 다음 신문에도 나왔는데 그 집인 줄 모르고 다시 전화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그래서 서귀포 시내권에 있는 집들 중에서 몇 군데는 집 위치를 기억하기 위해서 사진을 찍어두었다.
이 집은 천지연 폭포에서 가깝고 방 2개에 가스보일러까지 있는 집이었다. 게다가 2층 집도 아니어서 층간소음도 없을 것 같고 마음에 들었다. 근데 세입자가 출장 중이어서 집주인 얼굴만 보고 정작 집 내부를 보지도 못 했다. 게다가 마당 안에 들어가서 건물을 자세히 살펴봤더니 한 대문 안에 있는 집이 3채가 있었다. 맙소사! 집들이 가까이 붙어있어서 음악도 크게 못 들을 것 같고, 옆집에는 어떤 아저씨가 혼자 산다고 하는데 그렇게 신경 쓰일 수가 없었다. 어쩌면 괜한 노파심과 불안, 쓸데없는 걱정일 수도 있겠지만 서울에서 도어록 설치된 집에 살다가 대문도 활짝 열어놓고 다니는 '마당 공유' 형태의 집을 받아들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만약에 집 내부를 봤다면 마음에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집 안도 못 보고 이런 조건의 집을 덜컥 계약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2층 주택의 2층이 나와서 보러 간 집이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이 집은 정말 아까운 집이었다. 그때 계약을 안 했던 건 정말 이상한 이유에서였다. 집을 보러 갔을 때 2층에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울고 있었는데 부모가 보이질 않았다. 아이가 문간에 서서 울고 있는데 차마 "집 좀 볼게." 하고 들어가서 자세히 살펴볼 수가 없었다. 우는 아이를 달랠만한 재주도 없어서,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재빨리 자리를 피해버렸다.
위에 있는 집은 동홍동이었는데 한라산이 잘 보여서 인상 깊었다. 그런데 동홍동 자체가 서귀포 시내권에서는 조금 외곽지역이라 편의점도 한참 나가야 하고 동네에 가로등도 별로 없어서 외진 느낌이 많이 들었다. 게다가 내가 원하는 조건은 바다에서 가까운 집이었는데 동홍동에서 바다까지는 걸어 다닐만한 거리가 아닌 것 같았다.
아무튼 이래저래 집을 보러 다닐수록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고, 근심은 점점 깊어졌다.
어쩌면 원룸이나 빌라, 아파트 이런 주거 형태가 더 깔끔하고 혼자 살기는 더 편할지 모른다. 그런데 여태껏 서울에서 그런 곳에 다 살아봤는데 제주도까지 와서 그런 곳에 살고 싶지는 않았다. 이유는 단순히 마음이 답답할 것 같았기 때문인데, 이런 집들은 애초부터 배재하고 구하다 보니 결국엔 '좀 허름하더라도 단독주택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도 오일장신문에서는 그런 집들의 광고가 이렇게 나왔다. '독채, 방 2, 거실...' 하지만 집을 보러 가면 다 쓰러져 가는 시골집인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집을 보러 갔을 때 일화가 생각난다. 집 근처에 가서 전화했더니 수화기 너머에 있는 할머니가 목소리를 높이며 굉장히 반겨주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기분 좋게 집을 다 둘러보고 슬슬 돌아가려고 했는데... 시간 괜찮으면 앉아서 감자라도 좀 먹고 가라는 게 아니가! 그러더니 내 신상정보를 물어보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짐작했어야 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어떤 의도가 있는 건지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물어본 질문은 대충 이랬다.
육지에서 온 거냐, 결혼은 했냐, 나이가 몇 살이냐, 형제는 몇 명이냐...
'집 보러 온 사람한테 참 별 걸 다 물어보네.'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문갑 서랍을 뒤적거리더니 사진 몇 장을 꺼내서 보여주셨다.
"이 놈은 첫째고, 얘는 둘째, 셋째, 막내..." 그러면서 천천히 잘 보라며 장가 못 간 자식들의 직업과 연봉, 집안에 땅이 몇 평 농장도 어디 어디에 있으니 먹고 살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이셨다. 서울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집 보러 온 처자한테 아들 사진을 보여주시는 이 할머니의 마음이 오죽하면 이러실까 싶어 안타깝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낯선 사람에게 그 어떤 경계심이나 의심도 없이 순수하게 사람을 대하는 모습에 너무 놀라웠고 감사했다.
집을 구하기까지 근 1달이 소요됐다. 집을 여러 군데 보러 다녔으니 발품도 충분히 팔았고, 제주의 집들이 어떤지도 파악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헛되이 보낸 시간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막판에는 신구간이 끝나가고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나는 다급한 마음에 단독주택 몇 군데를 대충 살펴보고서는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덜컥 계약을 해버리고 말았다.
나는 앞으로 이 집에서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드디어 집을 구했다.'는 안도감과 성취감에 도취되어 한껏 들뜬 마음으로 달콤한 꿈을 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