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사람이라서 다행이다
이사를 한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이번에 이사하면서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사건(관련 글)은 나로 하여금 '을'로써 살아가는데 필요한 '인내'뿐만 아니라 '정당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게 해주었다. 물론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고 문제의 집주인은 끝까지 내게 사과 한마디 없었다. 나는 당사자의 사과 대신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는 ‘집주인의 아내’가 하는 사과를 받았고, 보증금과 함께 예전에 떼였던 보일러 수리비까지 모두 돌려받은 후에 고소를 취하했다. 이러한 결말에 이르기까지 적잖은 스트레스와 물리적 비용을 지불해야만 했다. 그래도 내가 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빨리 돌려받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역시 인생엔 공짜가 없다.
그래도 냉정하게 보면 최근 몇 주간 나를 힘들게 했던 일들은 그렇게 대단한 사건도 아니었다. 나는 이미 20대 중반에도 '떼인 돈'때문에 법정에 서 본 경험이 있었다. 그때는 어린 나이에 법원을 드나드는 것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스트레스였고, 재판정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끝내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그땐 그랬다. 그래도 지나고 나니 '그런 일이 있었지.' 하며 무심한 듯이 그 날을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어차피 내가 직접 나서서 부딪쳐야만 하는 일이라면 힘들더라도 고스란히 겪어내는 수밖에 없다. 살면서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이었지만 인생이 뜻대로 될 리 없었다. 이번 사건이 터진 후에 그 날을 떠올린 건 자기 확신을 갖기 위해서였다. 다시 그때처럼 법정에 서게 된다면 이제는 조금 더 의연한 태도로 대처할 수 있을 거라는 자기 암시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나마 이번 사건이 법정까지 가기 전에 마무리된 것은 나의 강경한 태도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실 타고난 성격 자체가 좀 예민한 편이라 안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스트레스 받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하는 편이다. 삶이 모두 내 뜻대로 될 리 없는데, 무슨 일이건 스트레스 받아봐야 나만 손해라는 생각에서다. 어떤 안 좋은 일 하나가 불쑥 찾아와 내 일상을 불행으로 몰아넣지 못하도록 애를 쓰는 것이다. 이럴 때 내 행복의 마지노선을 사수하기 위해서 가동되는 최후의 안전장치는 바로, 내가 글 쓰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대학 시절, 교수님께서는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능하다면 범죄자 되는 일만 빼고 다 해봐라.”
이 말 하나가 이렇게 오래도록 남아 내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고 있다는 걸, 교수님은 알고 계실까.
그래서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작가로서의 밑천을 준비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일로 얻은 또 하나의 소득이라면 ‘갑질 하는 집주인 캐릭터’ 하나를 건졌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그 집주인에 관한 히스토리를 정리했더니 대략 5,700자 분량이 되었다. 지금은 겨우 5,700자에 불과하지만 혹시 아는가. 기존에 써 놓았던 ‘갑질 사장 캐릭터’와 더해져 한 편의 소설이 될른 지도.
그래 이렇게, 안 좋은 일을 겪을 때마다 내가 글 쓰는 사람이라는 게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평범한 일상이 주는 행복
또 요즈음의 일상에서 작은 행복을 꼽는다면, 처음 살아보는 북향집에 대한 만족감이다. 제주에서는 습기 때문에 줄곧 남향집만 고집했던 터라 북향집은 처음이다. 집을 고를 때 채광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인데, 해가 너무 강하지 않고 적당하게 들어오는 데다 동향처럼 채광 시간이 짧은 것도 아니라서 대체로 만족스럽다. 지금 사는 동네는 제주 구도심 외곽에 있는 동네라 시내와 접근성이 썩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 대신 집에서 창문을 열면 바다가 조금 보인다. 제주도에서는 흔히 '먼 바다 전망'이라고 부를 정도의 집이다. 집에서 3분(230미터) 정도 걸어나가면 바로 해안도로가 이어진다. 제주 올레길 리본이 바람 따라 흔들리는 길을 베로나(반려견)와 함께 산책하는 시간이 하루 중 가장 행복하다. 요즘은 무더위를 피해 주로 저녁에 산책하는데, 날씨와 타이밍이 잘 맞는 날에는 예쁜 노을과 낙조를 볼 수 있다.
저녁에는 곳곳에 낚시를 하러 온 사람들이 눈에 띈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한가롭고 평화로운 기운이 감돈다. 해가 지면 해안선 끝에 동동 떠 있는 한치 배가 여름밤을 밝혀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제주 밤바다의 풍경이다. 창 밖에서 스며들어오는 그 불빛의 온도가 정겨워서 아직도 방에 커튼을 달지 않았다. 지난 한 달을 힘들게 지나왔으니, 당분간은 일상의 모든 것들을 지금 이대로 두어도 썩 괜찮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