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오피스 와이프 _ 두번째
차에서 대화는 아이들이 잠에서 깨는 순간 마무리 되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을 보며 웃음 짓는다. 어떤 순간에도 우리 자신이 부모임을 잊지 않는다는 점에서 남편과 나는 닮아있다. 상식과 비상식으로 싸우다가도 부모의 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그 날 저녁, 아이들이 밤잠에 들고 남편과 작은 방에 앉았다. 긴 시간 싸우고 대화했지만 우리 둘 사이에 어떠한 정리도 되지 않았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남편도 나도 아이들도 괜찮은 일상을 다시금 살아가고 있지만 정말로 괜찮은 사람은 누구도 없다는 사실을 마주한다. 남편은 여전히 자신의 안위에만 몰두해 있다. 회사 생활을 어떻게 지켜낼 것이며, 가족들에게 씌여진 자신의 부정한 이미는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생각에 빠져 자기연민을 느끼기까지 하는 듯하다. 자신의 잘못과는 별개로 자신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에 몰두한 남편을 보면서 구역질이 났다.
단 한 순간만이라도 진솔하길 바랬다. 이것이 지난 시간 동안 내가 남편에게 원한 단 하나였다. 정말이였다. 나는 남편의 진솔한 고백만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남편은 어떻게 하면 덜 부끄러운 사람으로 남을지 그 생각만 했고 그러면서도 어느 것 하나 바뀐 것 없는 일상에 만족했다. 그런 남편을 향해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쏘아부치자 남편은 그제서야 어설픈 고백을 이어나갔다. 손과장과의 대화는 호감없이는 할 수 없는 대화였다고. 그리고는 곧장 꼬투리라도 잡히면 어쩌나 하는 심정으로 갑자기 그 호감은 전우애 같은 거라고 말을 욱여넣었다. 그 순간 남편의 어설픈 고백에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자신의 결백을 주장할 증거들을 열심히 모았을텐데 어쩌나, 아내 말에 말려서 고백을 하고 말았다. 호감 그리고 전우애라.
새벽녁 남편의 어설픈 고백을 듣고 나니 기운이 빠졌다. 그리고 알았다고 했다. 호감은 호감대로 전우애는 전우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쨌거나 손과장이 좋다는 말을 저렇게 다르게 하다니 _ 나도 할 말이 없었다. 시계를 보니 곧 동이 틀 시간이다. 지금 이 상황에 무슨 생각을 더 할 것이며 무슨 말을 더 나눌 것인가 생각이 드니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방 문을 열고 나와 당장 할 만한 집안일을 찾았다. 빨래를 개었고 남편 와이셔츠를 다렸다. 작아진 아이들 신발을 정리했고, 현관을 깨끗이 쓸고 닦았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나를 보고 남편은 어쩔 줄 몰라했지만 나는 어쩔 줄 몰라하는 남편을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건 아마 체념이 아니었을까.
한 편으로는 이제 바람남 남편과 어떻게 '잘' 살아갈지 이 생각만 해도 된다는 사실이 반갑기도 했다. 더이상 이 남자의 외도가 사실인지 아닌지 스스로 의심하며 괴롭히지 않아도 된다. 적어도 하나는 분명해졌다. 다행이다.
호감과 전우애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간 아내가 미친사람처럼 새벽4시에 온 집안을 쓸고 닦고 있으니, 남편은 안절부절 못했다. 그리고 해가 뜨기 전에 가방을 챙겨 출근을 했다. 그 날 아침 나는 어느 때보다도 가벼운 마음으로 아이들과 아침을 맞이했고 등교를 시켰다. 요가원에 일찍 출근해 평소처럼 최선을 다해 수업을 했고 집에 오는 길에 반찬가게에 들러 반찬도 사왔다. 오늘은 라면 말고 이 반찬들로 한끼를 든든히 먹어야겠다 생각하니 평소보다 더 빨리 허기가 느껴졌다. 집에 돌아와 반찬을 통에 옮기고 있을 때 갑자기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고 남편이 들어왔다. 오후 반차를 냈다고 말하며 남편은 슬픔에 잠긴 얼굴이였다.
같이 쇼파에 앉았을 때 남편은 말했다. 아침에 청소하는 나를 뒤로 하고 길을 나섰을 때 마음이 아팠다고. 울컥했다고. 그리고 회사 가는 버스 안에서 지난 날 우리의 시간들을 떠올렸다고. 서로 사랑했던 지난날들을. 그리고 무슨 말을 더 했는지는 몰라도 나는 지난 새벽 내게 남은 '호감과 전우애'라는 단어를 지울 어떤 말도 찾지 못했다. 이미 남편의 외도를 마주했을 때 여자로서 느낄 수 있는 비참함과 슬픔을 모조리 다 찾아 흐느껴서인지 시간이 지난 지금 늦은 남편의 외도 고백은 오히려 덤덤하기까지 하다. 오히려 굳센 마음으로 바람남 남편과 '잘 살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네이버에 검색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