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원점

남편의 오피스 와이프 _ 두 번째

by 뚜솔윤베씨


손 과장과 지사장에게 전화를 건 다음 날 아이들 등원을 마치고 차에 탔을 때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근래 2년 동안 내게 퇴근한다고 전화한 것 외에 '그냥' 전화를 한 적이 거의 없는 듯한데 역시 어젯밤 통화가 남편의 다급하게 만들긴 했나 보다. 시부모님께 이 문제를 알릴 때도 그렇게 긴장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 아마 굽은 팔 안에서 평생을 보호받고 살아온 남편의 믿는 구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아침 일찍 걸려온 전화에서 남편은 꾹꾹 눌러내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의 '외도의 기준'이 어디까지냐고.

아뿔싸. 다시 원점이다.






아직도 그와 나 사이에는 이 일에 대한 정의가 내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호감과 전우애라는 고백으로 남편이 정서적 외도를 인정했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잘못했다고 내가 뻑에 취해 있었다고 용서를 빌었다가도 뒤돌아서서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했다. 그 여자한테 보낸 우리 애들 사진은 무엇이며 밤낮없이 시시덕거린 건 뭐냐고 물을 땐 침묵하다가 가정적인 아빠로 보이고 싶었다고 말도 안 되는 핑계로 마무리했다. 호감 없이는 나눌 수 없는 무수한 대화들을 뒤로하고 결백하다고 말했다.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을 찾느라 숨이 차 보이기도 했다. 남편은 비겁했다. 그러다가 언젠가 새벽에 나눈 대화에서 '호감과 전우애'라는 말을 끝으로 나는 남편의 정서적 외도를 공식화했다. 남편도 그렇게 받아들였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외도의 기준을 묻는다고. 섹스만 없으면 외도가 아닐까. 내게 남은 건 남편의 빈 껍데기뿐인데도 외도가 아닐까. 남편의 그 끈질긴 비겁함과 자기애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외도의 기준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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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실망을 핑계로, 이 남자는 내가 믿고 살아왔던 사람이 아니었구나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답했다. 당신이 그렇게 힘들어하면 손 과장, 지사장 만나지 않겠다고. 없던 일로 하겠다고 말했다. 때마침 어제 통화한 지사장은 방앗간 냄새라도 맡은 참새처럼 신이 나서 내게 문자를 보내왔다. 이 일을 남편에게 비밀로 할까요 말까요 하면서 말이다. 어떻게 하면 내 남편에게 작은 흠이라도 낼까 입맛 다시고 있는 지사장의 문자를 보면서 이렇게 회사 생활이 살얼음판이어서 손 과장이랑 놀아났나 싶어, 남편의 미성숙함에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래 안 만날게.






없던 일로 한다는 나의 말에 남편은 안도하는 듯했다. 그리고 자기가 보는 앞에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손 과장과 지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던 나의 단호함에 빗대어, 진짜로 없던 일로 한다는 말도 굳게 실행되리라는 믿음을 가지는 듯했다. 심플한 사고에 존경을 표하고 싶다. 나는 정말 손 과장과 지사장과의 만남을 없던 일로 했다. 손 과장은 끝까지 내게 답을 주지 않은 것 보니 남편과 뒤에게 이야기를 한 듯한데 남편은 아무런 연락도 취하지 않았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외도의 기준을 묻다니. 시간이 지난 뒤 남편에게 물었다. 그날 '외도의 기준'에 대해서 왜 물은 거냐고.

남편은 손 과장이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하면 어떻게 대처할지 준비할 생각으로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말이 나를 걱정하는 건지 손 과장의 명예를 걱정하는 건지 아직도 확신이 안 선다. 나에게는 빈 껍데기만 남아있고 손 과장에게는 오피스 허즈번드가 남아있다.




이 일 이후 남편은 급하게 이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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