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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솔윤베씨 Jan 14. 2024

1200원

당신의 이야기

글이 쓰고 싶었다. 새벽녘까지 잠을 못 잘 때도 아 _ 딱 이 마음만 글로 풀어내면 잘 잘 수 있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아이들 여권을 신청하러 가는 길, 책장에 있는 책 세 권을 챙겼다. 세 권 모두 다른 시기에 샀지만 한 번도 펼쳐보지 않아 새 책이 다름없다. 그 책들을 에코백에 챙겨 담으며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이 책 판 돈으로 점심 한 끼 사 먹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책머리에 내 이름을 안 써두었고 밑줄 하나 없다. 당장 서점에 갖다 놓아도 손색없을 정도로 깨끗하다. 내가 생각한 거보다 더 값이 잘 나오면 기분이 너무 좋을 텐데, 어쩌지?라고 김칫 국물을 집에서부터 마시면서 걸었다. 



그 책들은 왜 한 번도 펼쳐지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윤윤이들 여권 신청을 마치고 알라딘 중고서점을 향해 걸었다. 오랜만에 거리를 걸어보는구나, 햇살이 이렇게 따스하다니, 버스 정류장에 사람들이 이렇게 줄을 잘 서다니 우리나라 예전 같지 않아 선진국이야 선진국. 눈을 사방으로 굴렸다, 설렁탕 집도 있네? 갔다 오는 길에 여길 갈까 아니면 햄버거를 먹을까. 오랜만에 그냥 설렜다. 김칫 국물에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세상이 친절해 보였다. 기분 좋은 날이다. 


지하에 있는 알라딘 서점으로 가는 계단, 오랜만에 신은 플랫슈즈 똑딱 거리는 소리도 경쾌하다. 어깨에 맨 에코백 끈을 다시 한번 끌어안으며 서점에 들어섰다. 번호표를 뽑고 책 세 권을 가방에서 꺼내 계산대 위에 올렸다. 직원은 위, 아래, 앞, 뒤 아주 샅샅이, 빈틈없이 모조리 착장을 넘기며 숨겨진 밑줄을 찾듯 책을 살폈다. 한 권씩 책을 살피고 내려놓는데 그 책상 위에 이런 단어가 적혀있었다. 최상, 상, 하.


아마 책의 상태를 구분 짓는 거겠지. 괜히 긴장된 나머지 책장을 넘기는 직원의 손에서 눈을 못 떼고 있다가 다 놓인 세 권을 쓸어 담는 직원의 손끝까지 따라가서야 저 세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아싸. 세 권 다 최상으로 분류. 아싸. 점심 사 먹고 남은 돈으로 아트박스 들려서 솔이 머리방울 하나 사가야지, 윤성이는 자기 꺼 뭐 없다고 서운해할 텐데 속으로 생각하면서 흐흐 흐흐 웃었다. 긴장도 풀려서 그런지 실없는 농담이라도 한 마디 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기분 좋게 가벼워진 에코백을 접으며 계산된 값을 확인하는데, 눈을 몇 번 감았다 다시 크게 떴다. 1200원. 








분명 최상이라는 단어 옆에 1200원이라는 금액이 찍혔다. 아니 이럴 수가 없을 텐데? 뭔가 잘못됐다 싶어 컴퓨터 화면에 엄지와 검지를 갖다 대고 크게 늘리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내가 잘못 본 건가? 1200원이라니. 실없는 농담까지 닿았다가 한순간에 고개를 떨구어 발등을 바라보게 된다. 뭔가 씁쓸하다. 직원한테 물으니 상태는 좋으나 이미 서점 내에 재고가 너무 많은 책이라 기본값으로 책정이 되었다고 했다. (깊은 한숨) 서점 계단을 올라오며 그래, 집에 카레 있는데 그거 먹지 뭐,라고 생각했다. 아까 걸어왔던 그 길을 다시 돌아가며 땅바닥만 보게 된다. 그리고 계속 1200원이라는 숫자를 되뇐다. 천이백 원. 








대학 때 만났던 남자친구가 넌 언제가 작가가 될 거라고 했다. 나도 꿈꾸지 않았던 내 미래를 말하며 그 남자아이는 언젠가 쓰일 내 책을 읽고 있을 거라고 말했다. 남편이 될 운명은 아니었는지 글감만 남기고 그와는 헤어졌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그 남자아이의 말이 작은 씨앗이 된 듯 내 마음에 글을 쓰고 싶다는 소망이 늘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훗날 작가 인터뷰에서 할 이야기를 종종 혼잣말로 하기도 했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제 자신과 가족을 지켜내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 했기 때문에 순수한 호기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어요. 무언가 궁금해하고 상상하는 일, 소설을 쓰는 일은 애초에 제게는 맞지 않을 거라 확신했죠. 그저 제 이야기를 담아내는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거라 믿었습니다.' 땅땅땅! 인터뷰 끝 : ) 



그 인터뷰를 되뇌며 다시 1200원을 떠올린다. 내가 판 책의 저자는 알고 있을까, 자신의 책이 지하 중고 서점에 쌓여가고 있다는 것을. 단 한 장도 읽히지 못하고 1200원에 팔려간다는 것을. 설렁탕을 못 사 먹어서, 솔이 머리방울을 못 사서 씁쓸한 것이 아니었다. 내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거라 생각했던 나의 기록이, 언젠간 1200원에 중고 서점에 팔려가기도 하겠지 생각하니 기운이 빠진 것이다. 그래서 그 햇살 좋고 줄 잘 서는 선진국의 거리를 고개 푹 숙여 걸어왔다. 카레를 향해. 








책을 낸 적은 없지만 글을 쓸 때 행복한 건 사실이다. 좋아하는 일을 잘하게 되어, 성과까지 내면 얼마나 더 좋을까. 늘 마음 한편 그 꿈을 품고 있었는데 오늘 김칫 국물을 많이 마셔서 그런지 형체 없는 좌절감에 젖는다. 가벼워진 어깨가 허전하다. 그리고 한 번도 펼쳐지지 않은 그 책들의 내용이 궁금해 다시 발길을 돌려 알라딘으로 향하고 싶다. 1200원에 판 책을 더 비싼 값으로 다시 사서라도 꼭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고 싶은 충동도 인다. 



작가는 왜 책 제목을 저렇게 지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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