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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솔윤베씨 Feb 08. 2024

NADA (낫띵)

당신의 이야기

오늘은 발을 안 씻기로 마음먹었다. 독서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어둡고 조용한 거실을 지나 남편방으로 들어갔다. 숨도 안 쉬고 곧장 방으로 들어와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불을 켰다. 안 자고 엄마를 기다리겠다고 한 윤성이의 말이 떠올라 혹여나 안방 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가 들릴까 내 숨소리에 자던 윤성이가 깰까 봐 집에 와서도 집에 안 온 척을 했다. 


휴. 다행이다. 모두 잠이 든 모양이다. 오예. 

얼른 텔레비전 앞에 앉아 나는 솔로를 틀었다. 오늘 최종 선택하는 날인데 영호는 마음을 다잡았나 몰라 혼자 들뜬 마음으로 음량을 1에 맞춰놓고 목을 길게 빼 텔레비전에 들러붙었다. 이 모든 상황이 만족스러워 새어 나오는 웃음을 1에 맞춰 흐흐흐 웃고 거울을 한 번 쳐다봤다. 


독서 모임이 있는 날은 공식적으로 저녁 육아에서 제외되는 날이다. 격주에 한 번이라 늘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라도 돌아오는 자유의 밤이 너무 달콤해서 어떤 불평도 할 수가 없다. 오늘은 더군다나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자전거를 타고 다녀왔더니 상쾌함마저 더해져 기분이 너무 좋다. 배우 김희애는 어떤 시상식에서 상을 받고 기쁨 마음을 표현하길 '오늘 밤 저 와인 한잔할 거예요'라고 했는데 나는 발을 안 씻기로 굳게 다짐을 했다. 이상한 마음이지만 지금 나의 이 해방감을 발을 씻지 않음으로써 동봉해 버리겠다는?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

이번 주 독서 모임 책이다. 책 리뷰에서 따로 정리하겠지만 근래 읽은 박완서 선생님의 책과 더불어 내 영혼의 콘크리트를 깨부수는 도끼 같은 책이다. 좋은 글은 질문하지 않아도 답하게 된다. 오늘 모임에서 한 이야기 가운데 의미가 있었던 작은 일화를 기록하고 싶다. 


나는 물건을 잘 잃어버리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어디 수학여행이나 소풍만 갔다 오면 양말 한 짝, 도시락 뚜껑 뭐든 하나씩은 빼먹고 오는 오빠랑 다르게 나는 야무졌다. 남의 걸 더 챙겨 왔으면 왔지 내 것을 잃는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정말 어디 갔다 오는 길에 양말 세 짝을 챙겨 오는 일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 아빠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누구는 야무지다고, 연필 한 자루, 젓가락 하나 잊어먹는 일이 없다고. 그런데 그게 당사자인 나에게 하는 칭찬은 분명 아니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자랑 같지도 않았다. 그냥 같은 배에서 나온 자식들이 이렇게 다를 수도 있구나 부모 입장에선 너무 재미난 생각에 내뱉는 말인 거 같았다. 그래서 나는 엄마 아빠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뿌듯하거나 기분이 좋다기보다는 내 역할 중에 하나구나, 앞으로도 나는 그렇게 하게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 나는 불안했다. 내 물건을 잃어버려 칠칠치 못하다는 말을 들을까 봐 두려운 게 아니라, 진짜 내 물건을 잃어버릴까 봐 누가 훔쳐 갈까 봐 사라질까 봐 늘 불안했다. 지금도 그 불안은 더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고 내 마음에 있다. 어렸을 적에 목욕탕에 가면 목욕 바구니를 놓고 탕에 들어가서도 내 자리에서 눈을 못 뗐다. 누가 내 때수건을 가져갈까 봐, 내 샴푸를 몰래 눌러쓸까 봐 늘 조마조마했는데 늘 그렇지 않은 척을 하며 눈을 못 뗐다. 아마 진짜 그런 일이 벌어져도 큰소리로 성질 한 번 못 부릴 내 소심함이 더 앞선 걱정이었겠지만 나는 늘 불안했다









얼마 전 윤윤이들과 간 소아과에서 간호사가 한 말이 생각난다. 병원에 도착해서 덥다고 벗어 놓은 윤윤이들 외투를 양손에 쥐고 놓지 않는 걸 보고는 간호사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엄마, 병원에서 애들 옷 아무도 안 가져가, 내려놔요 덥잖아'_ 아니 나는 누가 우리 윤윤이들 옷을 가져갈까 봐 그렇게 싸 들고 있는 게 아니라 혹시나 내려놨는데 자기 애들 옷이랑 헷갈려서 바뀔까 봐 혹시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안 그래도 이번에 산 윤성이 뉴발 패딩이 동네에서 얼마나 자주 보였는데 그래서 내가 아울렛에서 괜히 샀나 후회를 얼마나 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들고 있는 거죠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간호사는 부산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날씨 이야기를 했다. 그 웃음이 얼마나 호탕했는지 내 마음을 콕 찍은 그 문장에 아무런 악의가 없다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은 정말 덥기도 더웠다. 나도 더워 패딩을 벗고 싶었지만 차마 패딩 세 개를 쥐고 있을 엄두가 안 났을 뿐이다. 








며칠 전 도서관에서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빌려 나오는 길에 자전거 자물쇠를 푸는데 어라? 분명 비밀번호는 맞는데 자물쇠가 열리질 않는다. 아무리 정확하게 맞춰도 열릴 생각을 안 한다. 내가 비밀번호를 까먹을 리는 없다. 나는 야무지니까. 그렇지만 이처럼 야무진 내 앞에 철옹성 같은 자물쇠가 꿈쩍도 안 한다. 안 열릴 걸 뻔히 알면서도 내가 아는 다른 비밀번호를 다 맞춰봐도 소용이 없다. 남편에게 전화를 해도, 남편이 삼천리에 전화를 해도 방법은 절단밖에 없다고 했다. 아_ 잠그지 말걸. 죄 없는 타인을 잠재적 자전거 도둑으로 생각하고 살지 말걸. 안장만 없어진, 바퀴 한 짝만 없어진 도로의 자전거들을 봐도 세상인심을 매도하지 말걸. 불안해하지 말걸. 왜 자전거 세우기 무겁게 어딜 가나 자물쇠부터 채우기 바빴는지 후회가 밀려온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가져갈 수도 있으니 그랬겠지) 내면의 소용돌이가 결국에는 절단기로 나를 이끈다. 


도서관으로 다시 들어가 먼저 웃었다. 도서관에서 절단기를 대여하는 상황이 웃겨서 인지 나의 견고한 불안이 웃겨서 인지 그냥 웃었다. 그리고 자전거 체인 절단 같은 거 안 한다는 직원분에게 시설팀에 전화 한 통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뒤에 남자 두 분이 정말 내 팔 길이보다 훨씬 긴 절단기를 들고 걸어 나오셨다. 됐다, 저거면 됐다 싶었다. 








유난히 바람이 차고 하늘이 맑은 날이었다. 걸어 나온 직원 두 분은 내게 비밀번호를 묻고 나처럼 정확하게 숫자를 배열한 뒤에 자물쇠를 열려고 했지만 내가 했던 것과 똑같이 꿈쩍을 안 했다. 지나고 나서 이 순간을 다시 생각하니 뭔가 우스꽝스러운데 같은 번호로 내가 했을 땐 안 열리고 직원분이 했을 땐 열렸으면 어땠을까 이런 상상도 해본다. 아무튼 그 시도 뒤에 한 분이 체인을 들고 다른 한 분이 싹둑, 체인을 잘랐다. 그 순간이 너무 짧아 아쉬울 겨를도 없었다. 그냥 허공에 대고 가위질을 한 것 같이 느껴졌는데 이상하게 체인이 잘려나가자마자 거기에 있던 세 사람 모두 크게 웃었다. 직원 두 분은 어이가 없어서 웃으신 거 같기도 한데 나는 정말 묘하게 그 순간 해방감이랄까 쾌감이랄까 속이 시원하달까 정의할 수 없는 기쁨이 느껴졌다. 이제 피할 수도 없겠지, 잠재적 자전거 도둑을 피할 수도 없겠지, 자전거를 세워두고 전전긍긍 미어캣처럼 고개를 빼고 두리번거리겠지. 그런데도 기분이 좋았다. 순간이지만 내 끈질긴 불안이 끊어져 버린 느낌. 과거에 일어나지도 않았고 지금도 일어나지 않고 있고 미래에도 일어날지 아닐지 확실하지 않은 모든 일에 메여있던 어리석음 같은 고리가 한 번은 끊어져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 별거 아니구나. 이렇게 맘 편히 살면 얼마나 홀가분할까. 스친다. 살아볼 수 없는 그런 인생이 스쳐간다. 새로운 자전거 체인 자물쇠를 사기 전까지 솔이꺼를 빌려서 다닐 나 자신 옆으로 그런 홀가분한 삶이 스쳐 지나간다. 그래서 웃음이 났나 보다. 



이 이야기를 오늘 독서 모임 끝자락에서 했다. 책의 내용이라기보다는 누구에게나 리스본행 열차 티켓을 손에 쥐는 순간이 오지 않냐는 이야기를 하며, 그저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하는 삶, 그 강렬한 삶의 욕구에 대해 이야기하며 말이다.  독서 모임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씻으면서 벗지 않은 양말을 바라본다. 하루 정도 발을 씻지 않아도 된다고.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삶에서 두려움이나 불안이 지켜내고 있는 것들은 진짜가 아니라고.


절단기를 잊지 말라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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