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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솔윤베씨 Aug 27. 2024

먼지 한 톨의 기쁨

나는 너무 작다고, 나는 먼지 같다고

지난 광복절 연휴엔 경북 봉화에 있는 청량사에 다녀왔다. 이 더운 날씨에 아이들 데리고 워터파크 갈 엄두는 안 나는데 산에 오르자니 기운이 샘솟는다. 오늘 엄청 힘들 거야, 밥 많이 먹어야 한다는 소리를 노래 부르듯 하며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니며 짐을 챙겼다. 12년 만에 다시 그 돌계단을 오른다. 줄줄이 애 둘을 데리고 연화봉 열두 봉우리 보다 아이들의 무거운 운동화를 더 많이 보면서 한 발 한 발 오를 테지만 벌써부터 기쁨이 차오른다. 여행은 이래야 한다. 



청량사는 남편과 연애할 때 처음 가 본 절이다. 내일로 기차 여행의 첫 여행지였던 봉화였고, 템플스테이를 하며 무심한 듯 고귀한 자연의 밤과 낮을 고스란히 담았던 곳이다. 너무 비현실적으로 모든 것이 완벽하기만 했던 순간.  분명 내 기억에 과장이나 미화가 함께 담겼을 거라 부정해 보지만 그 부정조차 쉽지가 않다. 작은 순간 하나도 잊지 않고 너무 선명히 내 안에 담겨있다. 



그렇지만 긴 세월 속에 그 청량함도 잊고 살아온 지 오래다. 아이들 크는 때 맞춰 여기저기 여행도 많이 다녔지만 청량사는 후보에도 오른 적 없고 아마 기억을 떠올렸더라도 애들이 어리고 거리가 멀다는 핑계로 분명 금방 지워졌을 테다. 그리고 이제 와서 무슨 낭만인가 싶게 애 늙은 마음도 없지 않았을 테지. 가끔 사람은 자신이 머무는 상황에 함몰되기 쉽다는 생각을 한다. 육아하며 엄마로 사는 게 무슨 블랙홀도 아닐 텐데 계절도 잊고 삼시 세끼 챙기는 것과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쓸고 닦는 일 밖에는 모르며 산다는 걸 무슨 훈장 간직하듯 한 적도 많으니까



그런데 보금자리가 바뀌고 일상이 변화한 지금 나는 블랙홀이 생겼다가 없어지기도 한다는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를 떠올린다. 나의 '지금'도 분명 다시 지고 피겠지 라는 생각으로 내 안에 남아있는 낭만을 찾아 내 생의 작은 열매들을 데리고 청량사에 오른다. 








10여 년 전에도 이렇게 가파르고 한없이 길이 이어졌었겠지. 호기롭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면서도 차오르는 숨에 헛헛한 웃음이 새어 나온다. 분명 시작도 안 한 거 같은 윤윤이들은 힘들다는 투정을 일찍이 시작했고 하 _ 업고 끝까지 못 갈바엔 어떻게 구슬려서라도 데리고 올라가야겠다는 굳은 마음을 먹는다. 다행히 때 맞춰 거미, 나비, 모기, 다람쥐, 도토리들이 우리 길 위에 등장했고 또 힘에 부칠 땐 산타할아버지도 부르고 유치원에서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들도 불러본다. 윤솔이는 이렇게 멋지고 대단한 누나가 없다고 어르고 달랬다가 아니 엄마도 이렇게 주저 않고 싶게 힘든데 이 길을 한 번도 포기 않고 오른다고? 몹시 놀라 눈을 까 뒤집으며 궁둥이팡팡 칭찬을 해 준다. 


윤윤이가 좋아하는 병관이 지원이 책에서도 아빠 생일날 산에 오르는 남매는 칭찬을 연료 삼아 산을 오르고 성큼 자라지 않았던가, 그 이야기를 떠올리며 여기가 청량사라는 것도 잊고 그저 그동안 육아서적에서 배운 대로 육아 9년 차 짬으로 두 아이들을 정상으로 들이밀었다. 또 들이밀어야 할 한 사람이 남편이라는 걸 잘 알았지만 어쩌겠는가 그저 쉬지 않고 가는 것 밖에 해 줄 응원이 없어 가끔 서서 숨을 돌릴 때 바라보며 많이 웃었다. 







그렇게 가파른 언덕을 끝없이 오르고 또 올라 결국엔 졸졸졸 산기슭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만나고 청량사 안으로 들어갔다. 윤윤이 들은 오르는 내내 대한민국 9살 중에서, 5살 중에서 가장 멋진 아이가 되었다가 곧 쓰러질 것처럼 온몸을 질질 끌며 칭얼거리는 품 안에 자식이 되었다가 모자와 티셔츠가 땀으로 다 젖었다. 그래도 경내가 시작된다는 푯말 뒤로 작은 물이 흐르고 봉숭아 꽃이 손길 닿은 기색 없이 여기저기 펴 있는 걸 보고선  숨을 가다듬고 부처님 듣고 놀랄세라 목소리를 낮춘다. 아이들의 개운한 얼굴을 보고서야 나도 남편도 고개를 드니 온 하늘이 열리고 나를 둘러싼 많은 봉우리들의 굳건함과 고요함에 새삼 경건해진다. 그래, 여기였지.  맞아, 그때 땅만 보고 올라오다가 처음 고개를 들었을 때도 이 공기 그대로였어. 한 순간에 나를 12년 전으로 돌려보낸다. 아 짖꿎은 열두 봉우리 같으니 _ 



아빠랑 먼저 석탑에 오른 윤성이는 언제 칭얼거렸냐는 듯 엄마 빨리 오라고 손짓한다. 여기 너무 좋다고 소리를 질러댄다. 부처님 놀랄까 봐 쉬쉬하던 게 바로 돌계단 밑에서였는데 석탑 광장에서 어찌 그 기쁨을 숨길쏘냐 싶다. 사진 찍느라고 계단 둘을 올라는 게 힘든 윤솔이를 데리고 서둘러 그 좋은 곳으로 향한다. 석탑 광장. 뿔이 세 개인 소가 묻힌 삼각우송을 등지고 신발을 벗고 천천히 마룻바닥 위를 걸었다. 아 _ 자연은 얼마나 큰 걸까, 산과 하늘은 얼마나 드넓고 높은 걸까. 나 자신이 너무 작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와중에도 두 눈을 감고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두 입술을 붙이고 미간에 힘을 풀고 코로 숨을 내쉬며 웃었다. 나는 너무 작다고, 나는 먼지 같다고 그래서 너무 좋다고 생각하면서. 








땀에 흠뻑 젖은 모자를 벗어 바닥에 내려놓고 두 손 모아 절을 했다. 감은 눈을 차마 뜨지 못하고 소리 없이 감사함을 전했다. 

 ' 소중한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키우며 저도 자라고 있다고, 건강하게 가족 모두 이곳에 다시 올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고 ' 준비해 온 것처럼 그렇게 진심을 담았다. 새삼 내가 너무 대견하고 뿌듯하다.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오는 것도 무진장 힘들었지만 그 보다 더 노력하며 살아왔으니 이렇게 예쁜 아이들이 엎드려 훌쩍이는 엄마 옆에서 바람에도 웃음 짓고 있는 것 아니겠냐고 혼자 생각했다. 그 생각에 닿으니 고개를 들 땐 나도 윤윤이들처럼 다시 웃게 된다. 아 _ 여기 풍경 정말 끝내준다. 때마침 기다렸다는 듯 우리 가족의 땀을 식혀줄 바람까지 불어오고 정말 여기 너무 변함없이 멋진 곳이란 생각을 했다.  광장에서 내가 너무 작게 느껴져 행복했던 것처럼 청량사도 청량산 속에 아주 작은 쉼터처럼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에 평안을 주는 곳이다. 과함이 없고 자연스러운 곳. 








한 참을 광장 마룻바닥에 앉아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하며 많이 웃었다. 그리고 하늘다리까지 올라갔다가 하루가 다 저물고 다시 내려왔다. 산속에서 어둠은 정말 빨리 찾아온다는 걸 온 가족이 몸소 느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온몸이 땀에 젖고 손 발이 떨리고 텅 빈 속으로 계속 웃어만 대면서 숙소로 향했다. 우리의 여행일은 광복절이었고 독립운동가 김정진의 만회 고택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만회 고택에서 방울토마토도 먹고 시리얼도 먹으면서 오늘 여행은 바쁘게 산다는 이유로 잊히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아이들 데리고 해외도 가고 남들처럼 호캉스로 즐기면서도 여행기 다운 글을 쓸 수 없었던 건 절대 잊혀지지 않을 것 같은 순간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_ 여행의 이유를 만들지 못하고 그저 상황에 묻혀서 남들 사는 만큼만 살아가고자 한 건 아닌가 지난날들을 돌아본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 똑같이 해외여행도 가려고 할 거고 호캉스 당연히 가서 수영장에도 가겠지만 이제 좀 속이 든든해진 것 같다. 친정에 가서 어릴 적 엄마가 해 주던 엄마표 김치찌개나 꽃게탕을 맛있게 먹고 온 기분이 든다. 파스타나 돈가스도 이제야 더 맛있게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





아, 이 뿌듯한 가족의 하루를 윤솔이가 일기장에 적었으면 좋으련만 _ 욕심일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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