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야
지금 동네로 이사와서 유일하게 깊이 사귄 사람이라면 옥이 언니 뿐이다. 솔이랑 동갑 친구가 있어 놀이터에서 몇몇 봤던 사이. 보기에도 너무 멋있고 여유로와보여 팬심가득한 마음으로 친하게 지냈던 옥이 언니.
같이 운동도 하고, 혼자에 익숙한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시간들을 많이 알려준 언니. 평일 낮에 준비도 없이 누군가를 집에 초대한다거나, 음식을 만들어 나눠먹는다거나, 운동 마치고 점심을 같이 먹으러 가는 것. 나의 일상과는 조금 다른 시간들을 알려준 언니다. 나는 이 아파트에 이사와, 아니 서울에 이사와 앞으로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살겠구나 싶으면서도 친구 하나 사귀기가 그렇게 어려워 여느 때처럼 혼자인 삶을 살았다. 오가며 마주치는 동네 엄마들과는 인사 정도만 하고 운동도 혼자, 밥도 혼자, 쇼핑도 혼자, 이야기도 혼자 ㅋㅋㅋ 뭐 그렇게 지내다 옥이 언니와 가까워 졌다.
그렇게 언니가 가까워 지면서 언니도 언니의 이야기를 나도 나의 아픈 상처를 서로 나누게 됐고, 더 깊이 있게 서로를 알게 됐는데 참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솔이랑 옥이언니 딸이랑 잘 안 맞아 우리 집에서 몇몇을 다투고 솔이가 울고 하는 일이 있었는데 사람 마음이란게 참, 그런 일이 있을 수록 언니가 불편하고 못마땅했다. 무슨 애 교육을 저따위로 시키나 싶기도 하고 누구 좋자고 솔이를 울리나 싶어 점점 거리를 두다보니 자연스럽게 왕래가 줄었다. 동네 언니 동생이란게 처녀적 언니 동생이랑 또 다르다. 가족이 있다 보니, 여러가지 감정이 뒤섞인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아는 사이지 않는가. 언니는 내가 어릴적 부모님의 이혼, 아빠의 폭력, 그리고 가족들이 어렵게 살아온 이야기 그리고 내게 남은 상처를 알고 있고, 나는 언니의 삶은 조금이나마 알고 있지 않은가. 일찍이 결혼하고 아들 딸을 두었지만 남편과 이혼하게 됐고, 큰 아들 딸은 부모님이 키워주시고 지금은 재혼한 상태, 그리고 재혼 후 얻은 딸.
사람이 참 웃기고 못난 것이, 알면 알수록 더 유치해지나보다. 나는 언니를 재혼한 여자로 생각하게 되고, 언니는 나를 또 나름의 해석을 하고 바라보겠지. 그렇게 서로 간의 불편한 기류가 흐르면서 오랜만에 요가학원에서 만났는데 언니가 임신을 했다고 한다. 40대 후반, 재혼, 그리고 두번째 임신. 언니는 임신 순간부터 아들이라 믿고 있었고 남편은 첫째 애기 때부터 아들이길 노골적으로 바랬다고 한다. 이건 누굴 탓할 수 없는 문제다.
그런데 나는 언니의 그 어려운 선택을 응원할 수 없었다. 임신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놀라긴 했지, 진심으로 축하는 못해줬다. '뭐야 그럼, 애를 넷이나 낳는거야?' 이런식의 저질스러운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는 왜 때문인지 언니의 기쁜 소식이 샘이 났다. 아마 속이 좁아서였겠지. 그리고는 악담이라도 하듯, 누가 알겠어 아들일지 딸일지 이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고 3달 후, 주말 아침 놀이터에서 언니를 다시 만났다. 입덧 때문에 헬쓱해진 언니를 보는데 안쓰러웠다. 아마 왕래가 없었던 그 시간 동안 불필요한 감정들은 사그라들고 순수하게 언니를 좋아했던 감정만 남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좋은 인연을 놓친 것에 대한 아쉬움이였을 수도 있다. 너무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아니면 아직 감정적으로 편하지 않아서인지 서로 딸들 그네만 밀어주고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냥 애들 어린이집 이야기, 뭐 그런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가 몇마디 오가고 정적이 흐르는데.
"딸이래"
언니가 불쑥 말했다. 아마 내가 궁금해 한다는 걸 알았겠지. 그리고 말하고 싶었겠지. 우리는 서로의 아픔을 나눴으니. 그 말을 듣는데 오만 생각, 오만 감정이 다 들었다. 딸이라는 소식을 듣고 남편은 얼굴이 벌개졌다는 말과 함께 언니의 씁쓸한 얼굴이 스치는데 그 순간 마음이 아팠다. 여기서 아들이냐 딸이냐는 정말 중요하지 않다. 언니가 누군가를 위해서 늦은 나이에 임신을 결심했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일에 언니가 가졌던 기대, 그리고 그 형언할 수 없는 뜨거운 마음은 알 수 있다. 나도 여자이고, 엄마이고, 아내이고, 며느리이고 그리고 딸이기 때문에.
그러면서 그동안 내가 빌었던 언니의 불행이 소름끼치게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딸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언니를 안쓰럽게 쳐다보는 내 눈빛에서도 역시 소름이 끼쳤다. 내 자신에게 소름이 끼쳤다. 아,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나는 이정도구나.
여동생 생겨서 좋겠네, 언니 저는 노력해도 둘째가 잘 안 생기네요 이런 뭐 상투적인 말들을 하고 짧게 대화가 끝났다. 그리고는 나는 솔이와 남편이 있는 곳으로 갔다. 언니와는 정말 오랜만에 힘들이지 않고 인사를 했다. 언제 한 번 집에 놀러오라는 말과 함께. 씁쓸하다. 인생이 씁쓸하다.
차에 타서 남편에게 옥이 언니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내가 언니한테 그런 나쁜 생각을 가졌었다고, 근데 이제 와서 동정아닌 동정을 하고 있다고 나 왜 이따위냐고 남의 불행이 뭐가 좋다고 그걸 내 위안으로 삼으려는지. 나 이렇게 못났는데 뭐라고 말 좀 해달라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저 언니의 이야기만 짧게 하고 끝냈다. 아마 솔직한 나의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옥이 언니겠지. 그리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언니와 다시 가까워지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나는 여전히 언니를 좋은 사람, 멋진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휴, 주말에 너무 많은 일들이 나를 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