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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Feb 07. 2017

백조의 호수, 이 빌어먹을 희망

백조의 호수 / 빌리 엘리어트


“스토리가 있겠죠?”

“사악한 마법에 걸린 한 여인의 이야기지.”


설레임과 불안함을 안고 발레리노를 꿈꾸는 탄광촌 소년. 소년은 아직 알지 못한다. 무심히 흐르는 제목도 사연도 모를 선율이 자신의 빛나는 도약과 함께할 것을. 저주에서 풀려나는 공주처럼 스스로를 구원할 것임을.

용기가 필요한 날이면 <빌리 엘리어트>를 본다. 짧게 스칠 뿐인 <백조의 호수>에 매번 감정 이입하는 것은 익숙한 선율 때문만은 아니다.



차이코프스키부터 매튜 본, 아담 쿠퍼에서 제이미 벨, 엘리엇 한나까지

달빛 아래 운명적으로 조우하는 연인, 기괴함을 넘어 압도적인 방해자들, 비극으로 치닫지만 사랑으로 발현되는 구원.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Swan Lake, Pyotr Ilich Tchaikovsky, 1877>는 취향의 호불호가 적은 명작이지만 발표 당시에는 악평 일색이었다.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받을 줄 알았다면 그의 실망은 좀 덜했을까?


거대한 백조의 날개에서 남자 무용수들의 근육을 연상했다는 안무가 매튜 본은 기존의 발레극을 댄스뮤지컬로 재해석한다. 피지컬 넘치는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Swan Lake, Matthew Bourne, 1995>도 초연 후 비웃음을 샀지만 혹평은 잠시 뿐이었다. 남자 무용수만으로 구성된 근친상간과 동성애 코드를 섞어 내면을 구사하는 서사는 전세계적 인기를 끈다. 알려졌다시피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엔딩에서 눈부시게 도약하는 발레리노가 초대 백조 아담 쿠퍼이다.

그 자체가 에너지를 요하는 영역인 발레는 여자 무용수의 무대라 해서 파워가 덜하지 않다. 그러나 시각적으로는 남자 무용수들의 군무가 조금 더 선 굵게 느껴지긴 했다. 내한 시 절정기를 살짝 지났음에도 아담 쿠퍼는 영화와는 또 다른 압도적인 무대를 보여주었다.

Adam Cooper, Pas de deux in Swan Lake, Matthew Bourne, 1996 (https://youtu.be/aAYsCIjwgGA)


동반 인기를 얻은 스티븐 달드리와 매튜 본의 성공은 뮤지컬로 확대된다. 웨스트엔드에서 초연된 <빌리 엘리어트 뮤지컬 Billy Elliot Musical, 2005> 속 ‘Electricity’를 부르며 도약하는 모든 빌리들 역시 전 세계적 인기를 얻는다. 뮤지컬 버전이라면 리암 모어나 엘리엇 한나가 먼저 떠오르겠지만 런던의 소년들 만큼 한국의 빌리들도 인상적이었다. 1대 빌리 김세용, 이지명, 정진호, 임선우의 무대는 배우별 개성이 살아있으면서도 원전의 감동을 구현해 낸 멋진 회차들이었다.




샤를로트 가스토가 그려낸 빛과 그림자

개성적인 작품들을 꾸준히 발간해 온 보림의 아트북 시리즈 <Collection II>에는 조금 특별한 <백조의 호수>가 포함되어 있다.

샤를로트 가스토는 페이퍼 커팅 기법을 통해 ‘그림자 발레극’ 같은 이미지들을 구현하고 있다.

운명론적 비장미가 담긴 전설은 빛과 그림자로 치환됐다. 가스토는 네이비, 화이트, 골드 단 세 가지 컬러와 커팅만으로 빛과 어둠, 운명과 구원에 관한 화려한 교차편집을 펼쳐 보인다. 라이센스 발행 시 인쇄의 완성도가 미묘하게 떨어지는 경우가 빈번한데 아트북 기획전집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국내 발행본의 퀄리티가 무척 훌륭하다.

<백조의 호수>는 발레단별로 여러 가지 엔딩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비극을 정설로 삼고 있다. 가스토의 아트북은 딱히 아동 대상의 동화책은 아니지만 축약된 분량상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페이징에 따른 반전된 이미지 교차 편집은 현란하면서도 드라마틱하다.




탄광촌의 백조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제국 패권다툼에서 밀려난 영국 경제는 당연히 곤두박질쳤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타국의 부러움을 사 온 복지정책은 영국병이라는 역풍으로 되돌아왔다. 이를 발판으로 집권하게 된 대처는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팔겠다며 국가 구조조정을 집행한다. 민영화 정책의 성공은 노동자들을 갈아 넣은 것이었고 전대미문의 실업자와 그 이상의 좌절감이 팽배했다.

이 대처리즘에 가장 거세게, 가장 긴 시간 대항한 것이 영국 북부 탄광촌을 중심으로 한 1980년대 ‘광부 대파업’이다. 낮은 수익성과 상징성 때문에 ‘내부의 적’으로 명명된 광부 노조에 가혹한 탄압이 이어졌다. 고립된 광부 노조는 결국 와해되고 미래 없는 미래로 복귀한다.


<빌리 엘리어트> 속 인물들은 계급적 한계와 빈부 차이가 또렷하다. 그러나 그 한계와 차이가 삶의 가치까지 결정짓는 것은 아니라고 품위 있게 말한다. 오히려 고통의 순간, 예술은 우리를 어떻게 위로하는지 보여준다.

거친 노동계급이지만 빌리와 가족은 온전한 삶을 이루는 것들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토니는 동생과 신경전을 벌이며 LP를 애지중지하고, 치매를 앓는 할머니는 종종 소녀 시절 배운 플리에 Plie를 구사해 본다. 장기파업에 땔감마저 떨어진 크리스마스 아침, 빌리의 아버지는 죽은 아내의 피아노를 뜯어 불태운다. 그가 기어이 눈물 흘리게 되는 것은 하루짜리 땔감으로 소모되는 피아노가 품위의 한 시절을 증명하는 유품이기 때문이다.

실패가 예정되어 있을지라도 스스로를 인간이게 하는 가치를 위해 그들은 투쟁한다. 때문에 그들은 빌리의 꿈을, 당최 보이지 않지만 ‘있을지도 모를 희망’을 차마 외면하지 못한다.


인간의 탄생이 자의적 선택이 아니듯 재능은 계급을 가리지 않고 피어난다. 예술은 가끔 불평등할 정도로 누군가에게 애정을 몰아주며 상상치 못한 모습으로 비상한다. 희망은 빌리의 아버지로 하여금 오욕의 역사를 감내하게 한다. 빌리가 가장 높은 곳을 향해 화려한 도약을 연습하고 있을 때 그의 가족은 가장 낮은 갱도로 내려가고 또 내려간다. 빌리의 도약은 희열과 회환을 동시에 안긴다. 갱도로 내려간 이들이 감내한 오욕을 위로한다. 확신하지 못했지만 믿고 싶어 했던 ‘희망’을 체화한다.

때문에 나는 <빌리 엘리어트>가 구원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되는 절망 속, 드물긴 하지만 구원은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수혜를 받은 이들이 뿌리는 비상의 아름다움은 홀릴 수밖에 없다.




새해,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오늘임에도 새삼 결기 넘치는 다짐을 해보는 시기.

그 새해도 한 달이 지났지만 올해는 유독 무력감에서 헤어 나오기 쉽지 않다. 권선징악, 희망과 용기의 모험 같은 것은 마블 영화에나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아니 그래서인지 어느 때보다 이 신자유주의식 신데렐라 판타지를 믿고 싶어 진다.

대부분의 우리는 여전히 갱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희생과 연대를 딛고 아름답게 도약하는 누군가가 우리들 중에 있을 거라고, 그 비상이 갱도의 또 다른 누군가에게 손 내밀 것이라고 믿고 싶다.

때로는 존재만으로 우리를 흔들어대는 가치, 이 빌어먹을 ‘희망’이 존재한다고.





@출처/

백조의 호수

The Collection Ⅱ, 백조의 호수, 샤를로트 가스토 (Le Lac des Cygnes, 보림, 2014, 일러스트 샤를로트 가스토 Charlotte Gastaut)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43309275


백조의 호수, 매튜 본 (Swan Lake, Matthew Bourne, 1995)


빌리 엘리어트, 스티븐 달드리 (Billy Elliot, Stephen Daldry, 2000)

빌리 엘리어트 뮤지컬 (Billy Elliot Musical,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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