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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Jan 10. 2018

삽살개, 그 아이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어린 시절이 항상 분홍색 솜사탕 같지는 않다.

사회적 보호가 미약한 어린이들뿐 아니라 평범한 어린이들도 크고 작은 부당함을 겪는다. 때로는 상처를 주는 이가 가까운 이라는 점이 이후의 삶에 긴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성인이 된 후 어떤 나이에 이르렀을 때, 어린 시절 마주한 어른들의 나이가 되었을 때 간혹 깨닫곤 한다. 그들도 그저 그 나이 때의 사람이었구나, 그 나이 때의 미숙함이 주는 함정에 넘어진 것뿐이구나. 연민이 가는 기억도 있지만 부당하게 생각되는 기억은 여전하다. 어찌 되었건 그때 나는 어린이였을 테니까.


에센바흐의 <삽살개>는 <플란더스의 개>와 같은 서정적 기대를 디킨스 식 비참함으로 배반한다. 아동학대, 동물학대, 인종차별.. 짧은 분량에도 끔찍한 소재로 빼곡하다. 이런 대물림이 무해한 존재를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그럼에도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문하게 한다.





고아 소년 ‘프로뷔’는 자신이 속한 성마르고 폭력적인 환경과 똑같은 모습으로 자란다. 선량한 여관 주인 ‘쇼벨’ 외에는 마을의 모든 이가 들짐승 같은 그를 멸시한다. 프로뷔에게 사회적 모습을 심어주고 싶었던 쇼벨은 타인에게 부탁하고 감사하라고 타이른다. 그러나 프로뷔는 이후로 우유를 얻으러 가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부탁 따위는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다지며.


어느 날 프로뷔는 동네의 늙은 삽살개를 흠씬 때린다. 사라진 새끼를 찾아 쉼 없이 애끓는 소리를 내며 그가 잠자고 있던 헛간을 뒤져댔기 때문이다. 자신의 새끼를 프로뷔와 악동들이 즐겁게 물에 던진 걸 삽살개가 알리 없다. 그런데 늙은 개를 때린 후 프로뷔는 이전과 달리 심란해진다. 몇 시간 후 다시 나타난 삽살개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새끼를 프로뷔에게 필사적으로 밀어댄다. 어미 삽살개의 간절한 눈빛에 압도된 프로뷔는 얼떨결에 강아지를 받아 든다.


젖도 못 떼 자신의 귓불을 빨아대는 강아지는 어미 삽살개처럼 곧 죽을 것만 같다. 프로뷔는 모두의 멸시 속에 철저히 혼자인 자신과 똑같아진 강아지의 처지를 자각한다. 강아지를 그렇게 만든 이가 자신이라는 것도.

기력이 다해가는 강아지를 바라보던 프로뷔는 결연히 뛰쳐나간다. 쇼벨을 찾아간 프로뷔는 외친다.


“아주머니, 제발 우유를 좀 주셔요.


그 목소리는 억지로, 목구멍에서 짜내는 듯 굉장히 탁하고 괴롭게 들렸다.





온전한 관계를 경험하지 못하고 자란 프로뷔는 어떤 호의에도 반응하지 않는다. 인간이지만 들짐승처럼 살던 그를 개심시키는 것은 작은 선의를 믿는-부탁하는 동물이다. 극 중 어린이들이 갓 태어난 강아지를 물에 던져 죽이며 즐거워하는 것이 현대의 독자에겐 상식적이지 않을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개를 죽여대다 개심하는 프로뷔가 사이코패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동물보호라는 개념이 없던 시대에 가축이 아닌 짐승은 모두 잉여 소모품이었다. <빨강머리 앤>에서 조차 너무 많아 물에 빠뜨려 죽인 새끼 고양이에 관해 수다 떠는 장면이 나오니 말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삶의 부조리함은 개라고 해서 비껴가지는 않는다. 삽살개가 자신을 흠씬 때린 프로뷔에게 새끼를 데려온 이유는 그가 건넨 딱 한 번의 다정함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 다정함은 강아지를 빼돌리기 위한 악의로 가득한 속임수였지만 삽살개에겐 유일하게 기대볼 온정이었을지 모른다. 어떤 도움도, 관계도 필요 없다는 프로뷔의 오만함이 사실은 비참함을 견뎌내게 해주는 유일한 친구로서의 위악인 것처럼.

네로처럼 얼어 죽지는 않았지만 프로뷔와 어린 삽살개의 앞날이 밝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이제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게 된 프로뷔에게 희망이 다가서길 바라게 된다.

알려진 동화의 시시한 성인물 패러디보다 이런 작품이 진짜 잔혹동화가 아닐까?


각종 혐오가 최근에야 이슈가 되는 것처럼 호들갑 떠는 뉴스들이 지겨웠다.

혐오와 학대는 앞으로도 여전할 역사란 체념 때문이다. 형태마저 다양한 폭력들은 가부장 전통 속에 익숙해져 그 심각함을 종종 간과하게 된다.

친부에게 상습적으로 폭행당한 여자아이는 ‘다섯 살’이었다.

다섯 살, 어린이라 부르기도 뭐한 유아에 가까운 나이이다. 조그만 손과 발은 더없이 보드랍고 연약했을 것이다. 갈비뼈가 부러졌지만 친부의 매질은 그치지 않았다. 지병이 있던 아이가 매질 속에서 간절히 원했던 것은 물 한 모금이었다. 바닥을 기며 애원하는 다섯 살짜리 아이를 친부는 벌레를 죽이듯 자근자근 밟았다.

최근의 비슷하고 많은 범죄 중 ‘고준희 어린이 살해사건’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 모든 과정이 하나도 예상을 비껴가지 않았다. 그러나 지나가는 뉴스에도 여전히 기분이 처참하다.

사진으로만 봐도 참 말랐고 풀기 없는 여자아이였다.

그 조그만 아이는 얼마나 무섭고 외로웠을까?


어제보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이 나이에도 더 건강한 마음을 지닌 어른이 되고 싶다.

어린이처럼 구는 ‘어른이’가 아닌 어른다운 어른이 되고 싶다. 그것이 유일한 신년 계획이다.





@출처/ 

삽살개, 마리아 폰 에브나 에센바하 (Die Spitzin, Marie von Ebner-Eschenbach, 1901)

금성 칼라명작 소년소녀 세계문학 17권 독일 편, 삽살개 (금성출판사, 1979, 번역 이준범, 다케야마 노보루 竹山のぼ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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