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무언가를 ‘도모’한다는 것은 즐겁다. 혼자선 불가능했을 멋진 항로를 찾아내게 한다. 한편으론 함께라는 복수형을 내세운 비열한 ‘모의’도 낯설지 않다. 특히 어린 시절은 스펀지 같아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단박에 빨아들인다. 한 번에 쭉 짜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어떤 것들은 얼룩덜룩한 흔적을 남긴 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휘발된다.
‘노란 책’으로 알려진 <계몽사 현대세계명작 전집>은 작품 선별에 관한 심미안이 탁월하다. 그중에서도 한 권으로 묶인 <요술장이 소녀/국내 정식 번역판: 내 친구가 마녀래요>와 <멀리 간 소녀/국내 정식 번역판: 내겐 드레스 백 벌이 있어>는 사회화의 이름으로 겪게 되는 소외와 성찰을 담담하고 따뜻하게 풀어낸다. <내겐 드레스 백 벌이 있어>의 소녀 ‘완다’는 백인이지만 <내 친구가 마녀래요>의 흑인 소녀 ‘제니퍼’처럼 ‘유일하다.’
(이하 정식 번역판 제목을 따름)
#요술장이 아가씨, 두꺼비 https://brunch.co.kr/@flatb201/192
#계몽사의 노란 책 https://brunch.co.kr/@flatb201/76
‘매디’와 ‘페기’는 오늘 지각을 하고 말았다. ‘완다’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완다 페트론스키, 혀 깨물 것 같은 이상한 발음의 성을 가진 그 애는 월요일부터 등교하지 않았다. 보통 헛소리로 떠드는 남자애들이 앉혀지는 구석 자리 중 하나가 완다의 자리였다. 그런데 완다는 학급에서 가장 조용한 아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있는 줄도 모르는 아이다. 어쩌면 완다가 매일 진창길을 걸어 더러워진 신발로 등교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완다가 사는 보긴스 하이츠는 여름이면 온갖 꽃이 핀다. 그러나 몇 안 되는 이웃은 수상하고 불량했으며 멸시받는 가난한 동네였다.
구겨지긴 했어도 완다는 깨끗하게 세탁한 파란 드레스를 입었다. ‘매일’ 입었다. 완다의 드레스는 그 파란색 한 벌뿐인 게 분명했다. 어느 휴식 시간 페기는 한껏 예의 차리며 묻는다.
“완다, 넌 드레스가 몇 벌 있니?”
“백 벌.”
아이들 사이에 소란이 일었고 페기가 다시 물었다.
“모두 어떻게 생겼어? 아마 다 실크 드레스겠지?”
“응, 다 실크야. 색깔도 전부 달라.”
“벨벳도 있어?”
“응, 벨벳도 있어. 다 합쳐서 백 벌이야. 내 옷장에 모두 한 줄로 쭉 걸려있어.”
아이들은 완다를 보내줬지만 그녀가 자리를 뜨기도 전에 비웃었다. 백 벌의 드레스라니! 무슨 소리야. 그날 오후도 완다는 여느 때처럼 홀로, 건물 담장에 기대 수업종이 울리길 기다렸다. 구두나 모자로 품목만 바뀔 뿐 ‘완다의 옷장 놀이’는 꽤 오래 이어졌다.
매디와 페기는 완다의 친구가 아니다. 그날 아침, 두 소녀가 완다를 기다린 것은 여느 때처럼 놀리기 위해서였다. 완다가 등교하지 않아 둘은 지각한 것이다. 반에서 인기 많은 페기는 매디의 단짝이다. 페기는 절대 나쁜 아이가 아니다. 자기보다 어린아이들을 도와주고 동물을 괴롭히면 질색했다. 하지만 완다에게만은 가차 없는 페기가 매디는 내심 불편하다. 매디 역시 늘 누군가의 옷을 물려받아 고쳐 입었다. 그중에는 페기의 옷도 있었다. 다만 누구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고, 매디는 보긴스 하이츠에 살지 않았으며, 완다처럼 발음이 이상한 성을 가지지도 않았다. 만약 페기나 아이들이 이 모든 것을 눈치챈다면…
완다는 어째서 그렇게 뻔한 거짓말을 하는 걸까? 매디도 완다가 좋은 것은 아니지만 괴롭히기 싫었다. 지각은 했지만 완다를 놀리지 않을 수 있었기에 내심 안도감마저 들었다. 페기에게 완다를 그만 놀리자고 말하고 싶지만 용기가 나지 않는다.
다음날, 비가 오기도 했지만 오늘은 완다에게 낭비할 시간이 없다. 그런데 아이들이 들어선 교실은 놀라운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 선물? 증거? 복수? 교실에 남겨진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제니퍼와 완다의 이야기는 세대를 넘어선 아동문학의 정석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에는 그저 따돌림당하던 아이가 결국 작은 이해를 받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두 편의 동화는 아주 고전적인 가치를 고전적인 소재로 풀어내면서도 여전히 유효한 성찰을 드러낸다. 일상적이지만 현재까지도 고질적인 사회적 함의가 담겨 있다. <내 친구가 마녀래요>는 인종 차이, <내겐 드레스 백 벌이 있어>는 계급 차이로 인한 차별을 주시하고 있다.
제니퍼가 동네의 유일한 흑인인 것처럼 완다는 동네에서 유일한 이방인이다. 어린 시절부터 모두가 알아 온 이 백인동네 끄트머리에 이주해 온 폴란드 이민자기에 낯선 발음은 항상 우스꽝스럽다. 허영심이 친구와 같은 나이에 매일 똑같은 옷만 입는다. 종종 몽상에 빠지는 어눌한 완다는 애처롭지만 굳이 친해지고 싶진 않은 아이다.
예쁜 것에 즉각적인 어린이들은 서슴없이 잔인해질 수 있다. 어린 늑대 떼처럼 몰려다닐 땐 말할 것도 없다. 예쁜 소녀 페기는 마음도 곱게 쓴다. 그 선량함은 한정적이다. 자신의 절대성도 시혜도 거부한 완다의 꿋꿋함 앞에 페기가 나눌 연민은 없다. 자신의 조롱이 가해일 수 없다.
매디는 외모만큼 평범한 아이다. 완다와 친해질 생각은 없지만 괴롭히고 싶지도 않다. 충분히 평범하게 어린 매디기에 친구라는 보호막은 절대적이다. 완다를 향한 조롱이 자신에게도 해당될 수 있는 현실은 매디가 꼭 지켜내야 할 비밀이다. 완다처럼 홀로 담장에 기대 서있을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세 소녀 사이를 돌았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성인이 돼서도 ‘소셜 네트워크’ 혹은 ‘정치’, ‘친목’으로 명칭만 바뀔 뿐 유치한 악의마저 건재하게 계승된다. 그런 경험이 전무하다 단언한다면 아주 운이 좋았거나 스스로부터 돌아볼 일이다.
외로운 아이의 가장 오랜 친구는 고독과 자존심이다. 제니퍼는 책으로 완다는 창의력으로 보호벽을 쌓는다. 그러나 완다는 벽 뒤로 숨는 대신 기대어 기다린다. 누군가 자신을 발견하길, 평범한 한 마디를 건네주길.
상대적으로 인종문제에서 격리된 채 성장한 동아시아의 어린이들은 흑인 소녀 제니퍼의 고독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계급 자본으로 인한 결핍은 거의 대부분의 어린이들에게도 권력의 구도를 어렴풋하게 깨우쳐준다. <내겐 드레스 백 벌이 있어>의 소녀들은 모두 어린이다운 방식의 이해와 용서를 나누지만 완다의 애처로운 꿋꿋함은 여전히 긴 자국을 남긴다.
가끔 생각한다. 내가 거쳐온 페기나 매디나 완다는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 그냥 사이즈만 커졌을까? 나는 셋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웠나? 학교들은 모두 비슷한 괴담을 품고 있다. 그러나 진짜 학교 괴담은 팔꿈치로 걸어오는 귀신 따위가 아니다. 어떤 나이에 흔히 빠질 수 있는 함정이, 악의가 되풀이되는 것이야말로 진짜 유구한 괴담이다.
백 벌의 드레스는 백 번의 고백이었을 것이다. 너희는 이 색깔이 잘 어울려. 너희와 이 색깔들을 골라 보고 싶어. 나의 색깔도 함께 나눠 보고 싶어. 매디와 페기에게 남겨진 후일담은 이것으로 끝이지만 이 작품을 읽을 때마다 항상 바라게 된다. 완다의 백한 번째 고백은 그 애가 원하는 형태의 대답을 받았기를.
@출처/
The Hundred Dresses, Eleanor Estes, 1944
계몽사 소년소녀 현대세계명작전집 18, 멀리 간 소녀 (계몽사, 1972, 번역 이화진, 일러스트 김광배)
내겐 드레스 백 벌이 있어 (비룡소, 2002, 번역 엄혜숙, 일러스트 루이스 슬로보드킨 Louis Slobodkin)
Jennifer, Hecate, MacBeth, William McKinley and Me, Elizabeth, E. L. Konigsburg, 1967
Jennifer (Harcourt Brace Jovanovich, 1982, 일러스트 도라 레더 Dora Led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