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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Jan 12. 2018

요술장이 아가씨, 두꺼비


친구가 반드시 필요할까? 사교란 무수한 즐거움을 주지만 의무에 가깝게 감정을 탈취할 때가 있다. 스스로의 가치가 정리되는 시기가 오면 관계는 재편되기 마련이다. 자기 자신만으로 충만함을 느끼는 법도 깨우치게 된다. 그러나 이런 공공연한 비밀은 성인이 되어서야 다룰 줄 알게 된다.

유년 시절의 안도감에서 친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예상 가능하다. 동화 속 친구들은 순도 높은 우정으로 모험을 함께 하지만 현실의 우정은 좀 더 분주하다. 누구와 앉을지 서둘러야 한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세상이 아무리 넓고 넓더라도 지금 우리는 한 박스 안의 초콜릿이므로.




평범한 소녀인 나 ‘엘리자베스’에게 ‘제니퍼’는 특별하다. 제니퍼가 학교 전체의 유일한 흑인 아이여서가 아니다. 그 아이는 ‘정식 마녀’다. 학교에서는 서로 모른 척 하지만 마녀 견습생으로 선택된 나는 은밀한 자부심마저 든다.

견습생인 나는 토마토소스나 식빵 가장자리를 먹어선 안된다. 정식 마녀인 제니퍼는 삶은 달걀이나 커피 케이크를 먹을 수 있지만 나의 수련에는 날달걀이나 생양파 같은 괴식만이 허용된다. 뻔뻔할 정도로 당당한 제니퍼의 규칙에 가끔 의심도 든다. 하지만 한 겨울에 수박이나 신기한 골동품을 척척 구해오고, 엄청난 독서량으로 박식한 제니퍼에겐 반박이 쉽지 않다. 무엇보다 가식적인 신시아를 독감에 걸리게 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견습생 수련 덕분인 것만 같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마녀라고 소개하는 제니퍼와 마주친다.
할로윈데이 이벤트를 계기로 둘은 자주 어울리게 된다.
언제나 혼자인 흑인 아이 제니퍼는 놀라운 독서량을 가지고 있다.


‘하늘을 나는 연고’를 만들기로 한 제니퍼와 나는 재료를 모은다. 한 달치의 손톱, 라이언 밀크, 수박씨, 발자국이 찍힌 눈 뭉치.. 나는 이름만 들어본 ‘맥베스’에 영감 받은 듯한 제니퍼가 선언한다. 이 마법의 가장 중요한 재료는 끓는 솥에 첫 번째로 넣어야 하는 두꺼비라고. 그러나 보관하던 두꺼비에게 정이 폭 들어버린 제니퍼와 나는 ‘힐라리에즈라’라는 이름까지 붙여 애지중지 한다.

드디어 연고를 만드는 날, 솥이 끓기 시작하고 모든 재료를 다 넣었음에도 두꺼비는 여전히 제니퍼의 손 끝에 아슬아슬 매달려 있다. 제니퍼는 사랑스러운 힐라리에즈라를 진짜 던져 넣을까? 참, 그런데 왜 힐라리에즈라를 첫 번째로 안 넣은 거지? 결국 나는 금기를 깨고 소리 질러 제니퍼를 제지한다. 두꺼비는 도망가고 마법을 망친 나는 울며 집으로 돌아온다. 그 후로 제니퍼를 볼 수 없었다.

상황과 안 어울리게 너무 귀여운 두꺼비의 화들짝 표정.
마법을 망치고 우울함에 빠진 엘리자베스는 제니퍼에 관해 곰곰이 돌이켜본다.

날씨처럼 불투명한 상실감으로 우울한 날들이 이어진다. 어느 날 베란다에서 온실 딸린 멋진 저택을 바라보던 나는 문득 제니퍼가 어떻게 수박이며 두꺼비를 구해왔는지 깨닫게 된다. 제니퍼가 걸었던 금기를 돌이켜보게 된다. 이제 제니퍼와 나의 우정에 마법이나 두꺼비는 필요 없다.





뉴베리 더블 수상이란 수식이 없어도 코닉스버그의 작품은 한결같이 믿음이 간다. 작품 대부분이 재미있지만 강요되지 않은 교훈을 준다.

(한글 제목은 국내 발행본의 표제를 따릅니다.)

에이브 전집을 좋아한다면 <집 나간 아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익숙할 박물관 가출기 <클로디아의 비밀 From the Mixed-up Files of Mrs.Basil E.Frankweiler, 1967>, 아동문학에서는 흔치 않게 다중인격을 다룬 <내 안의 또 다른 나, 조지 George, 1970>, 역사 소재에 관심 둔 시기의 <거짓말쟁이와 모나리자 The Second Mrs. Giaconda, 1975>, 멋진 대답으로 귀결되는 <퀴즈 왕들의 비밀 The View from Saturday, 1996>, 이념의 상흔에 관한 <아메데오의 보물 The Mysterious Edge of the Heroic World, 2007>등 소재도 다양하다.

코닉스버그는 작품 간 인물을 교차시켜 자신의 필모를 하나의 세계관처럼 만들었다. 때문에 집필순으로 읽으며 비교해보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을 줄 것이다.


집필순이 아니라도 맨 앞에 세울 작품은 역시 <요술장이 아가씨 Jennifer, Hecate, Macbeth, William McKinley, and Me, Elizabeth, 1967>이다. 계몽사의 노란 책 중 한 권인 <요술장이 아가씨>, 정식 번역판 <내 친구가 마녀래요> 모두 원전을 충실하게 옮겼다. 

<요술장이 아가씨>의 고민과 해결은 제목과 달리 현실을 딛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착한 아이로서가 아닌 모든 아이로서 조망된다. 그 아이들은 대체로 착하지만 시기심, 허세, 거짓말도 간직한 진짜 어린이다.

#계몽사의 노란 책 https://brunch.co.kr/@flatb201/76

#내겐 드레스 백 벌이 있어, 백 번의 고백 https://brunch.co.kr/@flatb201/300

원전 1968, 요술장이 아가씨 1972, 내 친구가 마녀래요 2000


어린이들의 세계에도 사회적 피로감은 존재한다. 때로는 성인보다 훨씬 짙은 어두움이 드리운다. 신학기의 활기 밑에는 소속에 대한 불안이 흐른다. 원치 않는 그룹과 어울리거나 어떤 그룹에도 끼지 못하는 것 모두 공포스럽다. 작가는 이런 계층적 분류를 비밀을 공유한 은밀한 우정으로 치환시켰다. 몽상으로 고독을 견뎌내던 제니퍼와 고독해질 것이 두려워 따분함 속에 안주하던 엘리자베스는 ‘마녀 수업’이라는 어린이다운 몽상을 통해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낸다.

엘리자베스의 선망은 일방적이긴 해도 제니퍼가 처음 가져본 우정이다. 인종차별이 공고한 1960년대의 흑인 어린이는 자신의 고독을 초라함이 아닌 초연함으로 봐주는 이의 환상을 깨고 싶지 않다. 단호하게 말했으면서도 엘리자베스가 완벽히 지킬 수만은 없는 금기들을 슬쩍 눈감아 주거나 첫 번째 재료라고 선언한 두꺼비를 끝내 던져 넣지 못한 이유다.

자신의 평범함에 대한 대리만족으로 제니퍼를 선망하던 엘리자베스도 깨닫게 된다. 제니퍼가 그저 평범한 소녀일지라도 자신에게만은 특별한 친구임을.

근대화로 인한 공단, 신축 아파트 같은 시대적 풍광은 감정의 결에 탁월하게 활용된다. 극 중 엘리자베스는 집 근처 공장에서 떠도는 향기로 요일을 구분한다. 향긋한 빵 냄새의 요일은 두 소녀의 화해에 훈풍을 더한다.


친구가 반드시 필요하진 않다. 그러나 우정의 체험까지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정식 마녀에게도 ‘함께’ 할 견습 마녀가 필요한 것처럼.



언젠가 검색을 하다 너무 취향인 글을 읽었다. 어쩐지 기시감이 들어 거듭 꼬리를 물고 들어가니 익숙한 글들이 떴다. 무척 좋아했는데 소원해져 서로를 지워버린 옛 친구의 글이었다. 조금 전 읽었던 명민한 글을 다시 읽어보며 ‘그래 이런 점 때문에 널 좋아했었지’라고 확인하게 된다. 내가 기억에서 지운 시간만큼 못 본 글들이 많이 쌓여있었다. 몇 개 더 읽어볼까 하다 브라우저를 그냥 닫는다.

흔히들 우정의 장점이 영속성에 있다고들 한다. 나는 평범한 이성애자지만 우정에도 유사연애 감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안이하게 기울어진 관계는 결국 망가진다.

소원해진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유는 사라지고 감정만 남았다. 소원해질 수밖에 없을 만큼 스스로가 더 중요했던 나는 기어코 두꺼비를 솥단지에 집어넣었다.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 과거의 상처일 줄 알았는데 괴물일 때가 있다. 그것도 내가 만들어낸. 하여 상처와 수치심만 복기하고 만다. 그러나 연연하지 않으려 한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채로 둘 이유가 있다. 설령 이 관계에 새로운 역사가 가능하다 해도 과거의 흔적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여전히 그 친구가 행복하길 바란다. 내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나른한 예민함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게 무슨 위악인가 싶겠지만 상처받을 만큼 순도 높던 나의 지나간 우정을 상처로만 떠올리지 않는 날도 있길 바란다. 어느 시간 우연히 알아본 문장을 다시 외면하며 지나치더라도.





@출처/ 

Jennifer, Hecate, MacBeth, William McKinley and Me, Elizabeth, E. L. Konigsburg, 1967

계몽사 소년소녀 현대세계 명작전집 18권, 요술장이 아가씨 (계몽사, 1972, 번역 이화진, 일러스트 김광배)

내 친구가 마녀래요 (문학과 지성사, 2000, 번역 장미란, 일러스트 윤미숙)

East of The Sun; Jennifer (Harcourt Brace Jovanovich 1982, 일러스트 도라 레더 Dora Le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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