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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May 27. 2016

무우 잎사귀, 첫 번째 친구


대부분 형제, 자매는 우리가 가장 처음 사귀는 친구이다. 드라마처럼 애틋한 관계도 있겠지만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수시로 투닥투닥거리는.

이제 막 다섯 살이 된 ‘겐’에게도 두 살짜리 동생 ‘카쓰꼬’가 있다. 갓난쟁이기도 하지만 카쓰꼬는 귀찮게 쫓아다니진 않는다. 겐은 동생으로 인해 엄마의 관심에서 밀려난듯한 자신의 처지가 섭섭하지만 내색할 수 없다. 왜냐하면 카쓰꼬는 앞이 보이지 않으니까.


쓰보이 사카에의 데뷔작 <무우 잎사귀>는 발표 당시 일본의 전 국가적 전쟁 준비와 선동을 의도적으로 거세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일년 전 발표된 작품임에도 군국주의의 어둠과 전운이 거의 비치지 않는다. 간혹 배경에 등장하는 비행기나 군함은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수다로 소비될 뿐이다.

그녀의 대표작 <스물네 개의 눈동자>가 전쟁으로 무너져버린 미래를 올곧게 바라보았다면 <무우 잎사귀>, <감나무가 있는 집>은 현실의 전쟁을 철저히 무시한다. 쓰보이 사카에의 의도적 삭제를 회피로 보는 것은 다소 부당하다. 당시의 국가가 주도적으로 선동한 가치를 지워버림으로써 일상의 평화를 역설했기 때문이다. 전쟁 도발국에서, 그것도 여성 작가의 이런 개인적인 대항은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일이었을 것이다. 비록 일본 내 한정된 비판이고 전쟁 피해국들의 직접적인 고초와 비교할 수는 없더라도 말이다.

전쟁의 폐해를 사실적으로 그려낸 대표작 <스물네 개의 눈동자 二十四の瞳, 1952>


금성 전집 원전인 소학관 전집에는 당연히 일본 작가의 작품이 다수 실려있다. 일본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이 별권으로 실려있지만 금성 전집에는 쓰보이 사카에의 작품만 편집되어 있다. 이 전집이 국내 발행된 1970년대는 일본에 대해 훨씬 배타적인 문화개방 전 시기였다. 이런 국내 정서 때문에 비판의식이 또렷한 쓰보이 사카에의 작품만 선별된 것이 아닐까 한다.

섬세한 문장만큼 일러스트도 무척 담백하고 아름답다. 와카나 케이는 따뜻한 색감과 서정적인 구도로 작품 속 애틋한 정서를 가시화한다.




겐은 속상해 죽겠다. 엄마는 오늘도 동생만 고베에 데려가기 때문이다.

동생인 카쓰코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 시신경이 죽기 전에 수술하기 위해 고베의 큰 병원에 다닌다. 도시로 가는 커다란 배를 타고 싶은 겐은 떼도 써보고 심술도 부려보지만 엄마를 이겨낼 수 없다.

실직해 떠도는 아빠를 본 것도, 엄마가 뜨개질로 집안을 꾸려가는 것도 퍽 오래되었다. 모두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엄마는 카쓰코를 포기하지 않는다.


..토실토실 살쪄서 감기 한 번 걸릴 줄 모르는 몸인데도, 카쓰코의 감정의 세계엔 다만 식욕만 있을 뿐, 그 성장은 거부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순한 아이라고 마을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을 때마다 어머니는 홀로 가슴이 쓰라리다.


울적한 마음에 쭈그러져 있는 겐을 엄마가 부드럽게 안아 올린다. 겐의 두 눈을 가린 엄마는 장난을 친다.


겐, 가만히 있어요. 이거 보이지?

안 보여.

겐짱, 자 캐러멜 줄게. 어서 이리로 와봐.


엄마의 장난을 통해 눈이 보이지 않은 채 살아가는 것에 대해 어렴풋이 이해하게 된 겐.

짐짓 의연하게 할머니네 집에서 기다릴 것을 약속한다.


“엄마, 울지 않고 기다릴게. 나중에 겐이 장님이 되면 고베에 데려다줘.

나 할머니 집에서 얌전히 기다릴게.. 카쓰짱한테 캐러멜 줄까?”



겐의 할머니도 카쓰코가 안타깝지만 어려운 형편에 큰돈이 드는 치료를 고집하는 며느리가 이해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무서운 줄도 모르고 서양식 수술이라니.. 그저 굿이나 한 번 하고 말았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하지만 자그마한 희망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엄마의 분투에 겐의 큰아버지가 돕겠다고 나선다. 어른들의 사정을 이해할 리 없는 겐은 오랜만에 보는 엄마가 서먹하다. 이렇게 자신을 내버려 둔 것도 새삼 원망스럽다.

별빛 가득한 밤, 하얀 무우꽃이 만발한 들판을 지나며 겐의 마음은 이내 풀린다.

카쓰코의 눈이 고쳐지면 함께 별을 보겠다고 조잘대는 겐을 업고 엄마는 집으로 향한다.




<무우 잎사귀>는 반전 피력 외에도 당시 일본 내 여러 사회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과학을 불신하는 전근대성, 고학력 실업자와 전쟁 인플레 등은 스치듯 지나가는 배경처럼 보이지만 실질적 가장인 엄마를 통해 약자로서 여성의 분투를 그리고 있다. 비일비재하게 관습화 된 문제들이 미치는 파급과 착취는 담담하지만 섬세하게 묘사된다.


코찔찔이 어린이지만 겐은 체념을 넘어서 이해를 배워나간다. 고베에 따라가지 못하는 서운함도 카쓰코가 건강해진다면 참아줄 수 있다. 아직 카쓰코는 볼 수도, 알 수도 없지만 겐은 아마도 그녀에게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줄 것이다.

팍팍한 현실 속 엄마는 문득 완치된 카쓰코와 겐이 함께 떠들썩하게 노는 것을 상상한다. 근거 없이 애틋한, 소망에 가까운 낙관은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삶의 동기일 것이다.

당연해야 할 평화와 한결같아야 할 일상에 대한 작가의 간절함처럼 말이다.





@출처/ 무우 잎사귀, 쓰보이 사카에 (大根の葉, 壺井榮, 1938)

금성 칼라명작 소년소녀 세계문학 29권 동양 편, 무우 잎사귀 (금성출판사, 1979, 번역 최미나, 일러스트 와카나 케이 若菜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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