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특유의 접근성과 인기에도 만화는 어느 시대건 공정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억대의 웹툰 작가는 현재도 극히 일부 그룹이며 타매체 진입을 통한 부가가치 의존도가 크다. 작가라는 명칭에 걸맞은 작품의 수요에 대해 질문할 수 있겠지만 이 장르를 문화로서 존재하게 하는 인프라는 어느 시기에도 제대로 갖춰진 적이 없다.
하다못해 창작자의 생존과 직결되는 기본 유료화에 대해 ‘뜨더니 돈 밝힌다’는 댓글로 도배되는 시대이다. 거지근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악플들을 보면 댓글부터 유료화가 이뤄져야지 싶다.
때문에 <월간 르네상스>의 성공은 ‘국내 최초 순정만화 전문지 발행’ 보다 ‘국내 순정 작가들의 인프라 구축 시도’에 더 무게감을 두어야 할 것이다.
편의상 ‘순정 작가’라고 썼지만 1990년대 대표 순정 작가들은 소녀만화의 외피를 쓰고 다양한 주제와 장르를 선보였다. 개인주의 서사와 작가주의 시도를 주도하며 향후 다양한 작가군의 터전을 구축한다. 도제식 수련 아래 배설구식 소년만화와 무협지 물량이 압도적인 당시 순정 작가들의 분투는 장르의 질적 향상과 긍정적인 시장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월간 르네상스>의 성공은 무수한 아류 잡지들의 창간을 불러왔지만 그 인기를 이어받은 승자는 <댕기>를 우선으로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곧바로 시장을 선점한 것은 아니었다. 후발주자 <댕기>는 최초인 만큼 한계를 드러낸 <르네상스>, 김영숙식 콘텐츠 일색으로 외면받은 <하이센스>, 격주 발간지를 시도했지만 역시 미숙한 조직력의 <로망스> 등을 레퍼런스 삼았다. <댕기>는 육영재단이라는 안정적인 자본을 바탕으로 기존 순정지의 대형 작가들을 모으고, 격주 발간을 통해 공격적으로 구독자를 취합하며 속도감 있는 순환구조를 모색했다.
무엇보다 발행 초기부터 ‘단행본’ 시장을 사수하고자 애썼다. 우선 대본소 시절 인기 높은 고전 순정물들을 별책부록으로 내보냈다. <사랑의 아테네, 신일숙>, <불새의 늪, 황미나>, <늘 푸른 이야기, 이미라> 등의 별책을 모으며 성취감 느끼던 독자들 꽤 있었을 것이다. 앞서 르네상스 편에서 언급했듯이 대본소 시절은 소장에 대한 수요가 있어도 공급 자체가 차단되었기에 이 별책부록들은 호응이 높았다.
#월간 르네상스와 대본소 시장 https://brunch.co.kr/@flatb201/52
부가가치 창출에 노력을 기울인 <댕기>는 기존 연재분의 단행본 출시라는 순환 구조와 브랜드화된 네임밸류를 확보한다. 콘텐츠면에서도 기존 잡지들보다 좀 더 밀도 있고 아기자기했다. 작가의 신변잡기적 경험에 의지하던 것에서 벗어나 ‘콘텐츠’화 된 기획력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작게나마 좀 더 직접적인 창작자 해석을 엿볼 수 있던 <작가 에세이>, 일러스트로 구현된 여성지 차용 콘텐츠 <컬러 에스프리>, <뮤직 에세이>등의 고정 꼭지들을 만들었다.
역시 규모는 미미했지만 장르면에서도 종합 문화지를 지향했다. 높은 인기에도 팬덤 안에서 비공식적으로 유통되던 애니메이션이나 인기 영화 소개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일러스트레이터 정해찬이 고정 연재한 <헐리웃 여배우 가이드>는 평이한 내용에도 한동안 에어브러시 스킬의 유행을 이끌었다. 광고 이미지 보정 등에 활용되며 새로울 것 없던 이 스킬은 윤택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로 정해찬에게 인지도를 선사했다.
선발주자들의 장점만 취해 안정적으로 시장 진입에 성공한 것처럼 보이던 <댕기>에도 폐간의 시기가 찾아온다. 사실 수준 자체는 폐간 몇 년 전부터 이미 하향화 되고 있었다. 이후 장르적 특성이 강조된 <오후>, <나인>, 연령별 구독층에 따른 <화이트>, <윙크>, <요요> 등 무수한 기획 잡지들이 창, 폐간된다.
그러나 이 잡지들이 원래의 의지대로 뜨겁게 끓어오르던 시기는 이미 지나가고 있었다. 사실상 순정만화 전문 잡지라는 타이틀에 어울리는 대형지는 <댕기>, <화이트> 정도가 아닐까 한다.
한국 순정만화의 르네상스는 짧게 끝나고 시장 침체가 찾아온다.
그럼에도 이 시기 순정만화의 질적 향상이 현재의 시장을 떠받치고 있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시장이 웹툰으로 대거 옮겨간 현재, 조직력과 콘텐츠에 있어 이 같은 시도가 다시 이루어질까?
함부로 예측할 수 없지만 지금과 같은 시스템에선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출처/ 댕기 (육영재단, 1991.12-199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