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들이 4살 6살 유아들이라 주변 엄마들이 자녀 교육에 대한 관심이 꽤 높다. 엄마가 되기 전에는 이렇게 글자도 모르는 어린 아이를 자녀로 두면 아직 교육에는 관심을 가지기 전이겠지 하는 막연한 추측을 했다. 하지만 엄마가 되어보니 실상은 달랐다.
오히려 유아기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이 순서가 부모의 자녀 교육 관심도 순서인 듯 하다. 아이가 어릴 때일수록 자녀에 대한 무궁무진한 기대감이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다가 내 아이의 영특함이나 학업에 대한 태도를 보고 점점 그 기대치가 줄어들면서 교육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레 사그러드는 그런 모양새다.
나 또한 엄마로서 아이들의 교육에 당연히 관심이 많다. 하지만 내 아이들이 꼭 공부를 잘 하면 좋겠다, 공부 분야의 진로를 택하면 좋겠다는 생각은 없다. 당연히 부모로서 내 아이가 공부를 못하는 것보다는 공부를 잘하는 게 좋겠지만 그건 부모의 이기심이나 바람일 뿐 내 아이가 원하지 않는데 억지로 끌고 나가는 건 결국 탈이 나고 만다.
두 아이의 엄마인 나도 어릴 때는 공부하는 학생이었고, 엄마 아빠의 기대를 받는 어린 자녀의 입장으로 살아온 세월도 꽤나 길지 않은가. 내가 자녀라는 그 입장으로 살았을 때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우리의 부모님 세대는 가난과 사투를 벌이던 가정이 많았기에 끼니 걱정으로 자녀 교육보다는 가정 경제가 훨씬 큰 화두였던 시대를 살아왔다. 그러다보니 공부에 대한 갈망이 그 어떤 시대의 부모보다도 크다. 이 베이비붐 세대 부모들의학업에 대한 열망이 자녀에게 투영된 게 대한민국이 전 세계에서 가장 교육열이 높은 나라로 우뚝 서는 데 일조했다.
우리 부모님 또한 교육에 대한 갈망과 아쉬움이 많으셨기에 나와 오빠에게 모든 걸 쏟아부으셨다.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했으니 너희는 떳떳하게 좋은 학교 졸업장을 따서 좋은 직장에 다니며 누구를 만나도 자기 명함을 자신있게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엄마 아빠의 이 한 마디에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향해 열심히 달렸던 것 같다. 결과는 나쁘지 않지만 그 과정은 참혹하다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렇기에 나는 내 아이들이 그 고통을 똑같이 격는 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부모의 기대에 대한 부담감, 내가 원치 않는데 일단 등록해서 다니라고 하면 가야 하는 학원, 과외.
물론, 부모는 방향성을 스스로 잡기 어려운 자녀를 위해 길을 알려주고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건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걸 원하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엇을 선택하고 싶은지 아이의 의견을 묻는 그 절차는 생략되어선 안되는데 우리 부모님은 그 과정을 과감히 생략하고 쭉 길을 제시한 경우였다.
그렇기에 내 어릴 적 결핍은 주도성, 주체성이었던 것 같다. 모든 부모는 자신의 어릴 적 결핍을 자녀가 생기면 자녀에게 채우기 위해 노력하며 평생을 살아간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나는 부모가 된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적어도 공부, 학습에 대한 강요는 일체 하지 않고 있다. 내가 그로 인한 고통이 너무도 컸으니 말이다. 내 아이들에게 선택의 연속인 삶 속에서 기회의 연속인 삶을 열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내 결핍의 증거다.
스스로가 학습에 대한 호기심, 관심, 의지가 생길 때까지 기다려주고 싶다. 고등학생이 되어서까지도 그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해도 전혀 상관없다. 내 아이가 더 좋아하고 잘하는 게 분명 있을테니까.
유아기인 지금 우리 아이들은 아직까지 숫자, 한글 등에는 관심이 없고 뛰어놀기, 종이접기, 노래 부르기 등에 더 관심이 많아서 색종이를 듬뿍 사주고 놀이터와 공원에 매일 데려다주며 좋아할 만한 노래를 틀어준다.
교육열이 넘쳐나고 특히 너무도 어린 유아기에 이미 공부를 지나치게 시키고 있는 부모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속단해선 안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와 친한 친구 하나가 다섯 살배기 아이를 이미 학습의 바다로 풍덩 빠트린 걸 보고 왜 그렇게 어린 아이를 벌써 공부시키는 건지 물어보았다. 친구의 대답에 나는 그제서야 이해가 되었다.
우린 서로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를 깊게 나누어보았다. 가방끈이 길지 않지만 교육열이 높은 엄마 밑에서 자란 나와, 가방끈이 길지만 자녀에게 공부를 크게 강요하지 않는 엄마 밑에서 자란 친구였던 거다.
나는 엄마의 독단 속에 내 선택권은 박탈 당했고 엄마가 정해준 길대로 걸어야만 했기 때문에 내 아이에게만은 그 길을 걷게 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내 친구는 엄마가 자율성을 부여하는 육아를 하고자 공부에 대한 잔소리나 의견을 크게 제시하지 않으셔서 엄마의 무관심으로 인해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학업 성취도를 이루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거다.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쭉 전해주고 난 뒤 친구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내가 어릴 때 우리 엄마가 조금만 나에게 관심을 기울여주고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을 단 한 번이라도 해주셨다면 나는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너무 커. 그래서 내 아이에게만은 공부할 기회, 공부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싶어".
친구와의 대화 이후로 어린 유아에게 공부를 시키는 엄마들을 절대 비난하지 않게 되었다.
모두가 커 온 양육환경은 달랐기에. 자신이 커 온 양육환경이 엄마가 되어 육아관에 반영된다는 게 진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