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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avus Aug 22. 2020

0. 영재성의 병리

항상 부정하며 무시해오던 나의 특징, 영재성을 고려하기 시작하다


  과도기

 

  지금은 2020년 중반을 넘어선 여름이다. 이 시기의 나는 아주 큰 전환점을 겪고 있어, 많은 일이 끝나가고 있고 동시에 많은 일이 시작되고 있는 과도기에 있다. 그 간극 속에서 다시금 '나'를 돌아보고 사유할 여유가 오랜만에 찾아왔다. 나는 여유가 있어 생각이 많아질 때면 발전을 생각하며 미래를 내다보기보다 자책하며 과거를 돌아보고는 했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겠지만, 과거에만 머무르는 것은 그 과거가 긍정적이었는지 혹은 부정적이었는지에 상관없이 결국 악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과거가 없으면 미래가 없다는 말 역시 옳지만, 과거에 안주하거나 과거에 묶여버리는 것 역시 미래를 암울하게 만든다.


  끝없이 후회하고 자책하는 굴레를 힘겹게 벗어난 나는, 지금 '나'라는 결과의 원인이 무엇인지 분석하고 앞으로 나아갈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그 답은 철학 속에 있으리라 짐작하며 다양한 저작과 심리 이론을 접해보던 도중에 대학교에서 학업을 시작하며 탐구를 멈추게 되었다. 대학교에서 시작한 프로젝트들은 오직 현재만을 생각하지 않으면 버티지 못할 정도로 부하가 심했기 때문에 가끔 숨을 돌리며 이전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 되돌아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 시기를 보내고 오랜만에 맞은 여유는 잠시 놓아두었던 사고를 다시 시작하기에 적절했다. 또한 큰 변화가 시작되기 전에 이 고민에 대해 어느 정도 명확한 해답을 찾기를 원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번 과도기에 내가 집중하는 것은 '영재성'이다. 나는 중, 고등학교를 거치지 않고 검정고시로 학력을 얻었기 때문에 청소년 시기에 내가 교류한 사람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평범함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반면, 대학교에서 만난 다수의 평범에 가까운 사람들은 이전에는 하지 못했던 새로운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아주 간단히 표현하자면 나는 그들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학우들과 특별한 대화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왜 저런 행동을 보이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원인은 나와 그들 사이에 성격을 넘어선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큰 차이는 영재성과 감정에 둔감하다는 특징인 것 같다.



 영재성이란 그저 특징일 뿐


  '영재'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어떤가? 머리가 좋은 아이, 재능 있는 아이 등의 중립적인 정의에 이어 어쩌면 잘난 체 한다, 자만, 재수 없다 같은 부정적인 느낌이 따라올지 모른다. 대중이 가진 '영재'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나는 누군가 자신을 영재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를 영재라고 부르거나 생각하지 않았다.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보잘것없으며, 겨우 이 정도 수준으로 나를 영재라 부르는 것은 자만으로 느껴졌다. 이때 나에게 '영재'의 정의는 막연히 똑똑한, 지능이 높은 아이였다.


  이러한 나의 인식은 지능이란 것을 인간의 가치와 어느 정도 연결해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나는, 지능이 높은 사람이 '우월하다'고 위험한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던 중, 어떤 책에서 내 생각을 깨트린 글귀를 읽을 수 있었다.


       "여러분은 부디 지능과 인간의 가치를 분리해주길 바란다. 지능이란 신장이나 체중처럼 수치로 표현할 수 있는 인간의 특징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지능의 역설, 22p


  지능은 그저 특징이라는 인식을 하게 된 이후, 그렇다면 영재성 역시 특징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능, 그리고 영재성이 특징이라면, 그 특징에 따라 결정되는 다른 특징도 있지 않을까? 이 호기심에 대한 실마리는 영재 교육을 다룬 책에서 찾을 수 있었다. 영재를 판별하고 교육하기 위한 노력은 꽤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으며 영재를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 연구한 사례도 상당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재성이라는 특징을 가진 아이를 대상으로 한 연구는 단순히 떠올려지는 학업 성취도에 대한 것뿐 아니라, 교육법, 정서적인 특징, 상담 요구, 신경증, 일생을 추적한 종단 연구까지 다양했다.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재성이라는 특징도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계기였다.



  나는 영재인가?


  만약 누군가가 이 글을 읽는다면, 여기쯤 와서 자신을 영재라고 고려하는, 거만한 필자에 대해 의구심이 들 수 있겠다. 잠시 영재성이라는 특징에 대한 이야기에서 벗어나 나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적는 것이 좋겠다.


  사람을 평가하기 위해 만들어진 각종 수치를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살펴본다면 나는 특정 대학교의 영재교육프로그램을 약 8년간 이수하고 지방교육청의 영재교육을 중학교 자퇴 전까지 4년간 이수했다. 대학에 수석 입학하여 재학 중에는 국가 이공계 우수장학금을 수령했다. IQ로 따져보자면, 나는 대략 상위 0.67%에 해당한다(대중에 널리 알려진 고지능자의 단체, 멘사의 기준인 2시그마는 충분히 넘는다.). 언어지능만으로 한정하면 상위 0.3%에 해당하나, 동작 지능은 평균보다 좀 더 높은, 정상 범주에 들어간다. 어학 시험으로 따지자면 거의 아무런 노력을 들이지 않고 TOEIC에서 950점을 얻었다. 수능을 보면 국어나 생명과학 II에서 상위 10~20% 이내에 들었지만, 수학의 경우는 뒤에서 30% 이내에 들었다. 더하여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자퇴한 뒤 검정고시로 학력을 취득했다.


그래서, 나는 영재인가? 어떤 기준을 적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일단은 한국의 교육계가 인정하는 영재의 기준은 만족하고 영재교육을 이수했기 때문에 내가 영재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다.



  영재성의 병리


  위에서 언급했듯, 나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감정에 둔하다는 것이다. 사람과 친밀하고자 하는 욕구가 타인에 비해 크게 낮으며, 다른 사람의 감정을 추론하거나 공감하기 어려워하고, 나 자신의 감정조차 올바르게 느끼고 설명하지 못한다. 내가 나를 분석할 때, 혹은 나를 분석하는 사람에게 이 특징은 언제나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렇다면, 영재성이라는 특징도 마찬가지로 나를 분석할 때 참고해야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나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 적용하는 도덕적 기준, 혹은 성취 기준이 굉장히 높고 그 때문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것으로 보인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그런데 높은 도덕적, 성취 기준은 영재성의 결과라는 분석이 많다. 즉, 내 안에 존재하는 독립적인 성격이기보다 영재성에 연관된 성격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이 특성을 무시한 채 자신을 관찰해왔고 이제야 고려 대상에 포함하기 시작했다.


  세상 속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살아가며 어느 순간에는 힘든 시기를 경험할 것이다. 그 사람의 수만큼 원인 역시 다양하겠지만, 각 개인의 원인을 찾아내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의 분위기가 변화하며 이제는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기 시작했지만, 영재성은 사람이 가진 다양한 특성 중에서도 여전히 발견하기 어렵고 모호하며, 종종 무시되는 특성인 것 같다. 쉽게 드러나는 여타 특징과는 달리 영재성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영재성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에겐 정말 운이 좋게도 이런 특성을 일찍이 발견하고 잃어버리지 않도록 끊임없이 도와주신 부모님과 많은 선생님이 계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게 심리적인 동요가 왔을 때 나를 도와줄 사람은 많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나를 도와주시는 분들은 내가 감정에 둔하다는 특징만을 다루기에도 시간이 부족해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영재성과 그에 뒤따르는 심리적인 특성, 그리고 어려움에 대해 지금까지 알려진 내용과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논의할 생각이다. 나는 교육학이나 심리학을 깊게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므로 내용이 빈약해지거나 잘못된 해석이 들어갈 수 있겠지만, 일종의 질적 연구에 가까운 보고서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글을 작성한 이후 심리학 혹은 교육학에 조예가 깊은 분들의 검토를 통해 더 많은 사실을 깨우치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더하여 영재성을 가진 사람, 그 사람의 친구, 부모, 교사 등이 내 글로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거나 비슷한 점을 발견하고는 위안을 얻는다면 더없이 보람찰 것이다. 그런 순간이 올 때까지, 영재성의 병리에 대해 탐구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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