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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avus Sep 04. 2020

10. 뒤집힌 왜가리의 이야기

모든 게 뒤집어진 세상에서

  

  어릴 적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던 어느 날, 동네 하천길을 걷다가 찍은 사진이다. 하천의 물이 만들어낸 뒤집힌 인간의 세계 속에, 한 마리의 왜가리만이 반대로 일어서 있다. 저 거울 세계가 뒤집어진 것일까, 아니면 왜가리가 뒤집어진 것일까? 


  학교를 그만두고 몇 년이 흐른 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혼자 살게 된 나는 어느 날 아침 부산하게 움직이는 창밖 풍경을 보고 느꼈다. 나는 수년간 정지된 상태로 머무르고 있었는데, 바깥세상은 내가 어떻든 개의치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 생각을 하게 된 날, 아마도 이 날부터 내가 나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한 것 같다.





  영재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짧은 이야기를 마쳤다. 바로 이전 글에서 이야기했듯이, 영재라는 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환상, 혹은 고정관념이 바뀌었다면 좋겠다. 단지 조금 희귀한 특성을 타고난 사람들일 뿐이다. 영재를 단순히 IQ 130 이상의 사람들로 정의한다면, 극단적으로 말해 지적장애를 가진 사람들만큼이나 평균값에서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완벽함이란 환상을 심어주는 영재성을 가진 사람들이 왜 고통스러워하는지 단번에 이해하도록 도울 수도 있겠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Happiness in intelligent people is the rarest thing I know.


  이 글부터는 영재가 흔히 가진다고 밝혀진 특징과 함께 나의 이야기를 적어보려고 한다. 하지만 얼마만큼이나 이야기해야 할지 조심스럽다. 일부러 기존에 머무르던 플랫폼 대신에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브런치라는 플랫폼에서 익명으로 글쓰기를 시작했고, 이 익명성을 최대한 유지하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실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고 이후에 미칠 영향이 걱정스럽다. 그러니 익명에 기대어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만큼만 풀어놓아 보려고 한다. 


  그전에 나를 조금 소개하는 글이 필요할 것 같다. 영재성이라는 특징만큼이나 자라온 환경, 성격과 같이 한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삶에서 마주친 장면들을 모두 영재성이라는 열쇠로 풀이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나는 둘째이자 막내였다. 영유아 시기 내내 부모님보다도 부모 노릇을 하고 싶어 하는, 나이 차가 큰 누나의 기세에 눌려 살았고, 그 덕분인지 자아 인식이 매우 부정적이었다. 사춘기를 지내며 반항하는 대상은 부모님보다는 친누나였다. 친누나 역시 스스로 책임을 지기에는 부족한 청소년 혹은 갓 성인이 된 어린 나이였고, 부모님조차 눈치를 살피는 성격을 가진 친누나와의 갈등은 건설적으로 해결되기보다 미봉책으로 덮어졌다. 그런 갈등이 누적되어 16살이라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출가하게 되었고, 이 시기 만들어진 기억과 경험은 현재까지도 트라우마 성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꽤 어릴 때부터 긴 기간 영재교육을 받았지만, 중학교 1학년 때 자퇴하며 더는 영재교육을 받을 수 있는 신분이 아니게 되었고, 부모님의 의지로 특수목적고등학교 진학에 도전하는 시늉만 해본 채 고등학교 졸업 학력까지 검정고시로 취득했다. 학교를 자퇴한 이후 수능 공부에 집중하기보다는 당장 내가 알고 싶고, 하고 싶었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데 더 열을 올렸다. 언제나 연구자가 장래 희망이었기 때문에 대학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그를 위한 준비는 하지 않은 채 시간만 흘려보내던 중, 운 좋게 이러한 활동을 모아 겨우 대학교에 진학했다.


  애초부터 사람에 대한 관심이 적어 부족했던 사회성은 홀로 지내며 퇴화했고, 입시에 대한 압박감과 지금껏 내린 선택에 대한 죄책감, 트라우마로 남은 과거의 사건 등 심리적인 좌절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우울증 진단을 받은 이후 현재까지 이에 대한 치료를 계속하고 있다.


  나에 대한 각종 표준화된 측정치는 다음과 같다. 방송 매체에서 강한 인상을 위해 주로 사용하는 표준편차 24로 웩슬러 지능 검사 점수를 나타내 보자면 종합 지능은 약 159, 특히 언어지능은 약 166이다. MMPI-2에서 우울증과 내향성이 유의한 수준으로 높고, KSCL95에서 유의한 항목으로는 우울, PTSD, 신체화, 자살 성향, 낮은 조절력이 나타난다. 지속성 우울장애와 정서적인 발달장애를 진단받았다.


  가장 처음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현재 나의 ‘결과’를 설명하기 위한 답을 찾으며 그 과정을 남기고 싶기 때문이었다. 내가 내린 선택도, 그 선택에 뒤따른 결과도 결코 흔치 않았다. 그런 선택을 내리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몇 년 전, 평범해지고 싶다고 진심으로 원하며 다른 사람들의 '평범'을 모사하기 위해 상담을 받았던 때가 있다. 나는 뒤집힌 세계에 서 있는 왜가리였을까, 아니면 세계가 뒤집혔다고 느끼는 뒤집힌 왜가리였을까? 어느 쪽이든 왜가리는 세계가 뒤집혔다고 느꼈고, 세계가 서 있는 방향과는 다르게 서있는 자신을 직시하기보다 스스로 뒤집히려 노력했다. 


  나를 뒤집으려는 노력이 쓸모없었다고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정말 필요한 과정이었다. 다만, 이제는 뒤집힌 나를 조금씩 받아들이고, 왜, 어떻게 뒤집혔는지를 알아가고 싶다. 영재성은 분명히 지금의 나를 만든 특성 중 하나일 것이나, 조사를 계속하다 보니 한국 문화에서 자라고 성장한 사람이 자신의 사례를 남긴 경우는 찾기 어려웠다. 자신을 돌아보기 어려운 숨 막히는 경쟁 속에서 살아온 우리 중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영재성과 연관된 문제를 겪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이 글을 통해 위안을 얻거나 생각의 변화를 가질 새로운 시각을 얻는다면 더없이 감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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