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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avus Feb 03. 2022

2. 생명의 가치

그 언제보다 가장 철저히 나누어진 계급 사회

 나는 비뚤어진 사람이다. 평균이 곧 정상인 세상에서, 평균치에 들어맞는 것은 외형뿐이다. 나의 내면, 그러니까 나의 우울함, 불안함 등 신경증적인 요인, 스트레스 장애 등 상상 가능한 대부분의 요소는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이 연재는 이런 필터를 낀 채 바라본 세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 (All human beings are born free and equal in dignity and rights.) 

세계 인권 선언, 제 1조


 얼마나 따듯하고 이상적인 말인가! Homo sapiens라는 공통된 정체성을 가지고 태어난 우리는 생물학적, 사회적 부모가 누구인지에 상관없이, 어떤 표현형을 가지고 태어났는가에 상관없이, 평등한 자유로움과 존엄,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적어도, 그렇게 교육받았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 조항에 얼마나 동의하고 있고, 얼마나 이 조항이 지켜지고 있으며, 또 얼마나 지켜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극단적이고 단순한 예시를 생각해보자. 1. 어느 나른한 주말 저녁, 바깥은 너무 춥다. 기상청은 대설주의보를 발령했고, 짙게 내리는 눈에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눈은 금세 길가에 쌓여 하얀 세상을 만들었다. 아무래도 바깥에 나가기엔 무리지만, 집에서 저녁을 차리기는 귀찮다. 하지만 요즘 시대가 어떤가, 인터넷과 인터넷에 연결되는 전자기기만 있다면 클릭 몇 번으로 손쉽게 저녁을 배달시킬 수 있는 시대다. 당신은 익숙한 듯 배달을 시킨다. 대설주의보가 내린 저녁, 배달을 해야 하는 라이더가 걱정되지만 개의치 않는다. 이 것은 그들의 일이고, 그에 대한 돈을 지불하니까. 당신은 라이더의 시간과 생명에 대한 위험성을 '배달비'라는 명목으로 구입했다. 아마, 그 값은 5000원이 채 안되었을 것이다. 물론, 라이더가 이런 날씨에 운전대를 잡은 것은 그의 '선택'이다. 운전을 하지 않을 '권리'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선택이 정말 라이더의 의지만으로 내려진 결정이었을까? 어떠한 뒷배경이 작용하지는 않았을까? 그 5000원을 벌어야 하는 입장과, 5000원을 편하게 지불할 수 있는 경제력의 차이에서 계급이 나뉜 것은 아닐까?


 2. 나는 가난하지도, 부유하지도 않은 집에서 자랐다. 절약이 몸에 새겨질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하는 집이었지만, 작은 집을 가지고 있었고 부족함은 없었다. 나는 드디어 대학에 입학했고, 1년에 천만 원이라는 엄청난 등록금을 부담해야 하는 실정에 놓였다. 가족은 장학재단의 문을 두드렸지만, 국가는 우리가 너무 부유하다며 도움을 거절했다. 나는 성적을 잘 받는 편이었고, 과에서 수석 내지 차석을 차지했다. 나는 이번엔 학교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학교도 내가 너무 부유하다며 도움을 거절했다. 결국 내 등록금은 은행의 문을 두드려 빌릴 수 있었고, 졸업할 때 까지 어떠한 장학금도 받을 수 없었다. 물론 나보다 도움이 절실한 학생들이 있다. 나는 먹을 것과 잘 곳 걱정은 안 하며 살았으니까. 그런데, 내 모든 노력을 덮어버릴 정도로 내가 부유했는가? 



현대 사회의 계급

 현대 사회에서 계급을 나누는 것은 당연히 자본이다. 위에서 들은 두 가지 예시도 모두 자본의 차이에서 유래한 어떠한 갈등을 표현한 것이다. 부유할수록 사람의 계급은 올라간다. 하나의 계급, 그 정체성은 무엇으로 표현되는가? 그 사람의 교육 수준, 경험의 넓이, 취향, 구매력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매년 해외를 여행하며 견문을 넓힐 수 있었던 사람과 국내 여행도 힘들었던 사람, 현지에서 어학연수를 받을 수 있었던 사람과 변변찮은 영어학원조차 버거웠던 사람, 자신의 수준에 맞는 대학을 선택할 수 있었던 사람과 등록금과 생활비를 걱정하며 대학을 다녀야 했던 사람... 과연 누가 더 '높은 계급'에 해당할까? 아비투스는 결국 부모의 자본에 의해 결정된다. 


 짧은 식견으로 생각하건대, 아비투스가 결정된다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지표가 차이 나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한 사람의 인간성과 발달 가능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필자는 소비에 대해 과한 죄책감을 가진다. 합리적이고 적절한 소비도 망설이고 자책하는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아끼다 보면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줄어든다. 부유할수록 얻을 수 있는 더 많은 경험, 그 안에서 소중한 자아정체성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시도조차 해보지 못한다는 것, 박탈된 기회는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만든다.


 가장 공정해야 할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단순히 영재 교육을 살펴보자면, 영재성은 가지고 태어나는 것임과 동시에 사후에 계발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영재성을 가지고 태어나더라도, 발견하지 못하거나 적절한 계발을 하지 않으면 그 불이 꺼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힘들게 맞벌이를 하는 부부와, 육아에 전념하는 사람이 있는 부부 중, 어느 그룹이 아이의 영재성을 발견하기 쉬울까? 영재성을 발견하고 그에 맞는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또 어떤가? 특히 영재교육이 미비한 한국에서, 가난한 배경의 영재가 나오기 어려운 이유는 이런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가장 공정해 보이는 대학 입시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나타난다. 서울대 입학생 중 수도권 학생의 비율이 가장 높지 않은가? 모든 조건을 압도하는 지능을 타고난 것이 아닌 이상에야, 고만한 영재들과 일반 학생들은, 부유해야만 그 지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당연하고 긴 예시를 굳이 건강과 의료에 대해서까지 줄줄이 적을 필요는 없어 보인다.



내 생명의 가치는

 필자는 개인적으로, 모든 것이 기록되는 현대 사회에 두려움과 거부감을 느낀다. 대부분 학생의 경우 12년간 많은 돈을 들여 공부한 결과는, 백분율에 의해 몇 가지 숫자로 나열된다. 그 숫자는 약 4년간 시간과 돈을 들이면 졸업장으로 바뀌게 된다. 그 졸업장에 개인의 재능과 노력 여하에 따라 몇 가지 줄이 추가된다. 토익 OOO점, XX자격증, OOO인턴... 나로서는 생존하기 위한 발버둥이었으나 그 결과물은 전산으로 등록된 짧은 문구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그 문구가 모여 내 가치를 입증하게 된다. 아마, 이 과정의 종착지는 매월 통장에 남는 급여, 혹은 순수익 이리라.

 

 그리고 더욱 무서운 것은, 모두들 이렇게 정리되어 나온 나 자신의 가치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장황하게 이야기했듯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부모의 자본이 미친 영향이 지배적인데, 자신의 가치는 공정한 기준 위에서 만들어진 양, 순수히 자신의 재능과 노력을 반영했다고 철석같이 믿는 것이다. 아마 이런 경향이 가장 심각하게 나타나는 가치는 학벌일 것이다.


 그래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사유재산이라는 개념을 폐기하고 모두에게 공평하게 분배하자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일상 속에서 한 번쯤 생각해볼 문제라는 것이다. 음식 배달을 시키며, 음식점에서 음식을 시키며, 지금까지 쌓아 올린 자신의 가치를 돌아보며, 과연 인권 선언 1조는 얼마나 가치가 있었는가?



* 필자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이러한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항상 염두하고 있는 저서들이 있다. '공정하다는 착각'과 '생명 가격표'이다. 시간이 난다면, 한 번 읽어보고 필자에게도 들려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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