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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소담 Jun 26. 2018

반 발자국이 이끄는 길

길은, 열린다, 길을 걷는 자에게.


부족한 것이 대차게도 많은 나여서 더 이해할 수 없지만, 나에겐 왜인지 알 수 없는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다. 어릴적 부모님 맞벌이 시절부터 여기저기 눈치를 보면서 자라서 그런가, 모자란 티 내고 싶지 않은 마음에 뭐든 열심히 하는 경향이 생긴 것도 같고. 뭐 하나 하면 끈질기게 해내는 우리 엄마 아빠를 닮은 것도 있겠지. 평생 우리집에서는 정작 공부해야 하는 나랑 동생은 맨날 숨어서 컴퓨터 하며 팽자팽자 딴짓하고, 엄마 아빠는 뭔가 진짜 징글맞게 도전하시고 공부하시며 사는 모습을 보아왔다. 그래서 그런지 뭔가 해도 제대로 해야하고, 하면 또 왠지 잘 해야할 것만 같다. 그리하여 나는 뭘 하든 늘 첫 발을 떼기가 어려운 습관이 있다. 왠지 잘해야 하는 것, 오래 걸릴 것 같은 일은 시작하기도 전에 이걸 잘 해내려면 요리 조리 이리 어휴 해야할 것이 산떠미 같은데!! 하며 애매모호하게 앞선 생각만 하느라 온갖 에너지를 미리 끄집어 다 써버린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좀 어이가 많이 없지만 그래도 그렇다. 그래서 애초에 생각만 하다 진이 빠져 시작을 잘 못하거나, 하면 진짜 올인하여 내 맘에 들때까지 부솨버리거나, 강제성이 없는 취미 같은 것들은 재미난 초반부를 지나고 레벨업을 위해 노력을 부어야 할 시점에서 멈춰버리곤 했다.


그리하여, 나의 '하고 싶은 것 리스트'는 해가 지나도 바뀌지 않은채로 계속, 계속!!!! 지겹게 똑같은 것들이 많다. (아이고 생각만해도 지겹다..) 모든걸 때려치고 온 아일랜드에서 그야말로 물리적 시간이 많아지면 당연히 리스트가 좀 가벼워 질 줄만 알았는데, 또 사람이 쉽게 변하면 죽는다고.. 안죽을라고 그라는지 그게 잘 되지가 않았다. 처음에는 오래 달고 살아온 우울증 때문에 에너지가 모자라 그런 것 같기도 했는데, 진짜 주 4일 학교 빼곤 암-것도 안하고 산지 1년이 지난 지금 어느 정도 에너지의 회복이 되고 나니 이제 핑계가 슬슬 없다. 결국엔 시작하지 않는 것도 지긋지긋한 하지만 어찌보면 단순한 '습관' 때문이라는 결론이 났다. 요 습관을 고치려면 무엇을 해야할까?



이번 학기 학교에서 각자 자신의 고치고 싶은 점 하나씩을 가지고 리챠드(학교 대장쌤)와 같이 세션을 진행한 적이 있다. 바스크에서 온 엔리케 아저씨(배우)는 요새 뭔가 창의적인 일을 하고 싶은데, 뭔가 시작을 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뭘 하고 싶냐 물었더니 아저씨는 책도 쓰고, 사진전도 열고, 필름도 만들고 싶고.. 하면서 하고 싶은 일들을 읊기 시작했고, 리챠드는 잠깐! 그 중에 딱 한가지만 골라 보라고 했다.


"짧은 필름을 찍고 싶어."

"그럼 필름을 어떻게 찍니?"

"먼저 왜 찍는지를 뭘 찍을지를 생각해서, 스토리를 만들고, 계획을 짜고, 사람들을 모으고... 근데 내가 이걸 몰라서 안하는게 아니야. 예전에도 해봤거든."

"(난데없이) 그럼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엔리케 필름찍는거 도와줄 사람?"

(다 손듦)

"그럼 미팅을 하면 되겠네, 다같이 만나서 뭘 찍을지 어떻게 찍을지!"

"(어이없어 하며) 아니 그래도 적어도 내가 이걸 왜 찍고 뭘 찍을지는 정해야지.."

"왜 찍고 싶은데?"

"음.. 그냥 뭔가 작품을 만들겠다는건 아니고, 뭔가 즐겁게 창의적인 무언가를 만들며 have fun 하고 싶은 마음이야."

"그럼 알렉 사람들, 학교 얘기는 어때?"

"그게 될 수도 있지.. 아니 사실 그 생각도 하긴 했어. 그치만 아직 마음이 확실친 않아."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즐겁게 창의적인 무언가를 만드는거 같이 해보고 싶은 사람?"

(다 더 손듦)

"그럼 우선 다음주에 미팅을 열어서 사람들이랑 얘기를 해보면 되겠네."

"음? 그럼 회의가 엉망이 될거야 분명히.."

"회의는 엉망이 되더라도, 넌 니가 뭘 하고 싶은지, 어떻게 하고 싶은지 지금보다 조금은 더 알게 될거야."

"사람들을 다 모아놓고.. 그렇게 회의를 하는게 과연 맞는걸까?"

"여기 이렇게 좋은 자원들이 널 돕겠다고 하는데, 도시락 까먹으며 그냥 얘기 해보는거야. 여기 있는 사람들 중 다음주에 도시락 먹으며 얘기할 수 있는 사람?"

(다 손듦)

"(방긋 웃으며) 자 회의 잡았어. 이제 너만 괜찮으면 되는데? ㅎ 회의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뭔가를 같이 하게 되든 안하게 되든 별 상관없어. 니가 지금 당장 내딛을 수 있는 바로 앞의 한 발을 내딛으면, 너는 자연스레 그 다음 걸음을 어디로 내딛어야 할지 알게 될거야. 길 위에 오르기만 하면, 자연스레 길이 너를 인도할거야."


리챠드는 어떤 기회가 왔을 때, 잠시 멈춰 여백을 가지며 곰곰히 생각하고 또 생각한 후 결정을 하는 것이, 사실 내가 할 수 있을 지 재고 따지느라 자꾸만 기회를 놓치는 마음의 습관일 수도 있다고 했다. 지금은 결코 알 수 없는 그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무언가를 절대 알 수 없게 되어버리지 않겠냐 했다. 너가 정말 멈춰야 하는 것은 알 수도 없는 저 먼 미래를 두려워하며 바로 앞, 니가 내딛을 수 있는 그 한 발자국을 떼지 못하는 습관이라고. 해야할 것들을 미리 생각하는 것은 사실 대체로 별 의미도 없다고. 바로 다음 스텝을 내딛으면, 그 스텝이 또 더 나은 스텝으로 그저 널 인도할 것이라고. 그러니 지금 바로 앞의 한 발자국을 별 생각없이, 해보라고. 왜냐면 눈 앞의 한 발자국은 대체로 너가 생각하는 그 미래의 거창하고 복잡한 무언가가 아니라, 너가 당장 다음주에 도시락 까먹고 농담따먹으며 할 수 있는 별거 아닌 재미난 일이니깐.


또 역시나 한 대 때리고 싶게 단순한 우리의 리챠드는 엔리케 아저씨와 보고 있는 나를 조금 짜증나게 했지만..ㅋㅋㅋ 별 수 없이 참 맞는 소리를 한다. 그리하여 엔리케는 도시락 까먹기의 회의 끝에 결국 우리에게 카메라를 빌리고 동의를 얻어 그 다음 주부터 학교에서 다큐멘터리를 찍기로 한다. 사람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너무 길지 않은 영상들을 짧은 기간 담아, 우선 그것으로 1차 영상을 만들어지는대로 만들기로. 몇 몇 관심있는 사람들이 영상 찍는 것을 조금씩 도왔으나, 사람들이 막상 도운 것은 별로 없는 듯 하다. 생각보다 술술 엔리케는 본인이 원하던 창의적인 일을 벌이며 한 2주간 낄낄대며 학교에서 즐겁게 영상을 찍었다. 암것도 모르는 나는 솔직히 저걸로 뭐가 될까 싶게 그는 정말 짧은 토막 영상들을 모았다. 중간 중간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웃긴 멘트를 연기처럼 치기도 했고, 재미난 순간들을 캐치하는 모습에서 뭔가 해본 뽄새가 났다. 지금 그는 스페인에 돌아가 영상을 편집 중이다. 며칠 전 역시나 기대했던 것 보다는 오래 걸리지만, 생각보다 맘에 든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나의 습관은 무엇인가를 곰곰히 생각했다. 나는 당장의 한 발자국도 왜이렇게 커보이고 부담스러운가. 참 유난도 스럽다. 한 발자국 조차도 잘 내딛어야 할 것 만 같은 나에게 필요한 것은 막 내딛어보는 반 발자국 연습. 그리하여 나는 큰 그림 속에서 뭔가 해야만 할 것 같은 일들을 순서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고 싶은대로, 내키는대로, 맘이 가는만큼, 즐거이. 아주 조금만 더 나아가보는 연습을 하고 있다. 건강해지기 위해 매일 시계처럼 일찍 자고 일어나 매일 뜀뛰기를 나가는게 아니라, 아일랜드 찬 바다에서 수영을 도전해보는 일. 기타 코드를 익히고 스케일을 공부하는게 아니라, 그냥 당장 제일 치고 싶은 노래만 지겹도록 실컷 부르는 일. 뭔가 제대로 된 곡을 만드는게 아니라 그냥 뚱땅거리는 거더라도, 중간에 대충 관두지 말고, 끝까지 뚱땅거리며 피아노를 쳐보는 일. 몸도 마음도 생각만큼 빠르게 좋아지지 않더라도, 좋아진 것들을 충분히 만끽하는 일. 책이 정말 정말 안읽혀도, 한 줄을 읽고 머리에 저장하고 맘에 들어해보는 일. 브런치에 쓸 글들의 목차를 만드는게 아니라, 한 줄이라도 우선 뱉어보는 일. 별 것 아니지만 별 것인 일들을 딱 반 발자국 씩만을 내딛어 보는 일.



그리고 그리하여 그렇게 두번째 글을 드디어 썼다는 스스로 매우 반가운 엔딩.


남은 시간들 동안도 좀 못나고 모질라 보이는 반 발자국을 속는 셈 치고 즐겁게 내딛어 보려 한다. 그 반 발자국이 이끄는 길이 얼마나 어마무시한 곳일지 내딛기 전엔 죽어도 모릉께.

작은 기대와 희망을 품으면, 보나스로 조금 더 아름다운 길이 나타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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