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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소담 Jun 14. 2019

#6. 어쩌다 보니, 베지테리언

초보 지구특공대의 일기 

어쩌다 보니 베지터리언의 길 위에 올라있다. 물론 고기를 완전히 끊었다고 선언하기엔 여전히 고기가 들어간 국물요리를 먹기도 하고, 가끔씩 고기를 조금씩 먹게 되는 날도 있다. 우유와 계란과 해산물도 여전히 먹는다. 하지만 점점 자연스럽게 고기를 먹는 양이 매우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을 느낀다. 

 

그저 집 앞 매일 보는 소와 말들에게 인사를 하며 다니다 보니 일어난 일이다. 아는 소와 아는 말이 생긴다는 것, 누군가와 친구가 된다는 것은 꽤나 큰 책임감이 필요한 일이었다. 무인도에 떨어졌다고 한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옆에 있는 친구를 먹지 않는 것과 같은 책임감 말이다. 


이번 더블린에 학교 전체와 일주일 동안 워크샵을 다녀왔는데, 5일 동안 처음으로 완전히 베지테리언 식단을 신청하였다. 5일 동안 밥과 김치없이 생활하는 것이라, 풀떼기와 가끔 나오는 생선으로 배가 고프면 어쩌나 걱정을 하며 평소엔 먹지도 않는 과자를 바리바리 챙겨갔다. 하지만 역시 집에서도 먹지 않는 과자는 몇 개 주워먹고 말았다. 걱정과는 달리 일주일 동안 완전히 고기를 끊으며 소식 아닌 소식을 하고 나니, 밥 먹고 곧바로 느껴지던 피로감이 꽤 사라졌다. 위가 점점 줄어들며 배가 막 고프지도 않았다. 신선하고 새로웠다. 나 혼자 식단의 소외감을 느낄 것이라는 우려와도 달리, 한 테이블에 8명 정도가 앉으면 5명 정도는 베지터리언 메뉴를 먹었다. 식사의 취향들은 비건 부터 베지테리언, 설탕과 글루텐을 먹지 않는 둥 모두가 다 달랐고 그 이유도 각양각색이었다. 채식 메뉴는 먹으면 먹을 수록 느끼는 것이지만, 생각보다 기대보다 맛있다. 이런 맛이 있었나, 이런 메뉴가 있었나, 이렇게도 먹는구나..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누구의 강요도, 어떤 잔인한 도축 산업의 비디오를 본적도, 애쓰거나 힘든 노력도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베지터리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가장 신기한 일이다. 환경의 힘이 이렇게나 큰 것일까. 몸이 고기를 먹고 싶은 날은 참지 않고 고기를 먹어 보지만, 예전과 같은 맛을 느끼지 못한다. 한 점 먹고는 더 이상 먹지 못할 때가 많다. 고기를 감각하는 모든 기관의 정보가 변화되었음을 느낀다. 굉장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라 생각했던 베지테리언이 되는 일은, 사실 그저 생각치 못한 친구가 굉장히 많이 늘어나는 일이었다. 그리고 한 번 시작된 우정과 사랑의 힘으로 자연스레 퍼져나가고 이어지는 일이었다. 


내가 먹고 있는 것이 어디서 부터 어떻게 오는지를 고려하여 재료를 선택하고, 내 마음과 몸을 행복하고 건강하게 하는 요리 과정을 선택하고, 얼마만큼을 언제 어떻게 먹을 것인가를 선택한다. 단순했던 먹음이란 행위의 세계가 이토록 넓고도 깊을 줄이야. 갈길이 멀지만 대단히 흥미진진하다. 오감을 뛰어 넘는, 풍요롭고 너그럽고 다정하고 다채로운, 엄청난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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