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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욜란다 Jun 01. 2022

03 다시 시작

단어와의 만남

오래간 만에 거머쥔 연필을  손의 감각이 낯설었다. 안경을 벗어도 다시 써도 눈앞이 흐린 것이 고새 나에게도 노안이라는 것이 왔나보다. 글을 꾸준히 쓰며 브런치에 남겨볼까 하는 마음을 품었으나 작가 지원에 탈락한  얼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   무렵, '대학원 과정을 마치면 상으로 읽을테야' 하며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김에 바로 읽어도  양이었지만 왠지 아껴 두었다가 읽고 싶었고 이것을 미루고 미루다  년이 흘렀다.  사이에  권은 집적거리기도  보았지만 대부분은 눈에 보이는 곳에 두고 그냥 바라보기만  뿐이었다.   


MBA Program입학과 동시에 입사 한 회사에서는 3개월을 다 채우지 않고 이직을 결심하고 말았다. 취업 영주권을 취득하면 적어도 3년은 더 근무를 해야 하는데 역시 관계의 문제가 있었다. 정신병자라고 소문난 사장의 괴롭힘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사장이 많이 착해진 꼴이니 참고 견디라는 동료들의 위로도 있었다. 하지만 매일매일 삼촌, 아버지뻘의 기사님들에게 가하는 그의 가혹 행위와 가스 라이팅에 내 미래 또한 암담하게 그려졌다. 어느날 부터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퐁퐁 먹은것 처럼 혀끝에 쓴 맛이 느껴졌다. 엄마가 싸 주신 샌드위치의 상추가 잘 헹궈지지 않아 쓴 맛이 나는것 이라고 컴플레인도 해 보았는데 나중에 안 사실은 스트레스로 인한 신체화가 진행되고 있던 중 이었다. 아무리 취업이 급해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에 해를 넘기지 말자 하고 이직을 결심하게 되었다.


공교롭게 나보다 더 나중에 미국에 온 가족들은 모두 정착을 한 상태이고 나 혼자 아무런 성과 없이 다시 원점인 채로 귀향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불완전한 현실이 불안했고 동생도 해외에 나가있는 때에 나까지 떠날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가족과 함께 머무르려면 이곳, 미국에서 정착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즈음 요리사인 언니의 권유로 식당을 여러 개 운영하시는 사장님을 소개받아 취업을 하게 되었고 사장님은 우리 자매에게 조그만 일식 퓨전 식당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며 나에게는 영주권 스폰서도 해 주셨다.


자연스레 Program의 마지막 과정인 PAP (Professional Applied Project)도 Organic Fusion Omagase스타일의 Gourmet Restaurant에 관한 사업계획서를 준비하여 발표했다. Program에 들어가 학위를 취득하기 위한 2년 반의 시간은 오버타임 근무에 풀타임 학생으로 하루 25시간을 뺑이치는 살인적인 스케줄이었다. 게다가 낯선 이민 생활에서 인지증과 노환으로 어려움을 겪는 부모님의 치료를 위해서도 고군분투해야 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미국의 정권이 바뀌며 강화된 반 이민 정책으로 서류 대기 시간이 길어지며 언니의 경우 1년 반 만에 나왔던 취업 영주권이 나의 경우는 1년짜리 노동 허가를 두 번 연장할 때 까지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무엇을 읽을 수도 쓸 수도 그리고 생각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마침 친구의 소개로 찾아간 지역 심리상담센터가 펀드를 받아 비영리 단체로 전환되며 엄마만 심리치료를 받으시던 것에서 온 가족이 일 년간 가족 상담 치료를 함께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도 뜻밖의 기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바쁜 스케줄 중 하루 반나절을 휴식하는데 하루 종일 꼼작없이 잠을 자야 또 일주일을 버틸 수 있는 상황에서 반나절을 꼬박 상담센터에서 보내야 하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우리 자매는 상담의 힘을 믿고 있었다. 언니도 나도 한국에서 발달심리학과 교육을 공부했고 특히 나는 미국에서 대학원 입학 전 Self-Care의 의미로 이민 가족의 어려움을 격고 있는 스스로의 문제를 마주하고는 뭔가 변화의 힘을 기르기 위해 택한 공부를 통해 Famiy Leadership Coaching자격을 이수한 후였다.


일주일에 한번 다니던 치료를 6개월 후에는 2주일에 한번만 받게 되었다. 상담 치료가 공장에서 쿠키 찍어내듯이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찍어 내 주지는 않는다. 당장에 무슨 큰 변화와 도움이 될까 의심이 갈 수도 있겠다만은 우리 가족은 상담 선생님을 믿고 따르며 내주시는 숙제도 열심히도 해 갔다. 상담을 위한 노트와 파일을 만들고 치료 후에는 각자 생각을 적어보고 감사일기를 썼다. 오늘은 앞 계단을 이용해 상담실까지 이동하였으면 다음 주 에는 뒷 길을 이용해 올라가 보자 하며 일상의 이러한 작은 변화도 놓치지 않고 시도하며 조금씩 그러나 점차 마음 가득 희망과 의지를 채워 넣었다.


보약도 정성이 반이라고 상담과 치료에도 반드시 좋아질 것이라는 신뢰와 믿음이 반이라고 생각한다. 믿고 따르니 일상에도 점차 변화가 찾아왔다. 식당에서 남거나 실수 난 음식을 버리지 않고 두었다 먹는 대신 영양가 있고 신선한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먹기 시작했고 걷기 등의 산책과 간단한 메모도 하기 시작했다. 상담을 받은 후 약 1년 반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상담은 마무리가 되었고 근본적인 문제인 '사람'은 그대로였지만 우리 모두 '나'를 우선 돌보아야 된다는 마음을 품고 각자의 영역으로 돌아왔다. 그 무렵 기다리고 고대하던 취업 영주권의 마지막 절차가 진행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40여 분간의 릴레이 인터뷰를 통과하고 또다시 추가 서류를 제출하여 결국은 영주권 승인을 받게 되었지만 곧 이은 Government Sutdown으로 최종 절차가 지연되면서 그야말로 똥줄이 타는 막바지 기다림을 경험 하게 되었다. 기다림에 기다림을 더하고 드디어 '그린카드'를 받게 되었으니 미국 온 지 장장 14년 6개월 만인 2018년 가을의 일이다.


긴장이 풀어지며 한 고비를 넘긴 느낌이 들었다. 비로서 살펴보니 내가 정말 오랜 시간 동안 책도 읽지 않았고 글도 쓰지 않고 있었구나 하는 현실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정말 삶이 힘들면 아무것도 표현할 수 없구나 마치 너무 미안할 때 미안하다는 말이 더 안 나오는 것에 이 상황을 비유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을 내 마음에 품고만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사놓고 읽지 못했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은 아끼고 있었던. 지금 읽으면 이 책도 독이 되겠구나 생각했던 뽀얀 표지가 그제사야말로 눈에 들어왔다.


[출처 pixabay Illustrated by Martina Vulcova]  


서랍장 위에 탑처럼 쌓아 둔 책 무덤에서 무심코 집어 든 것은 김영하 작가님이 쓴 [여행의 이유]였다. 책은 잡은 즉시 순식간에 읽어 내릴 수 있었고 나도 모르게 자를 집어 들어 곳곳에 줄을 긋고 책 모서리를 접고 있었다. 지금은 누구에게 주고 왔는지 모르는 그 책의 어떤 단어에서 큰 위안을 받았는지는 뚜렷하지 않지만 내 모국어를 몇 년 만에 만나 안심하며 읽은 글은 마음에 큰 위안이 되었다. 부드러운 작가님의 음성이 문장 안에서 들리는 듯했고 신기하게도 마음이 안정되었다. 좋은 단어가 주는 힘을 느끼며 나도 이렇게 단어로 문장으로 글로 위안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부러움이 마음속에 차 올랐다.   


신기하게도 내가 다시 메모라도 해야지 하고 글쓰기를 마음먹을 수 있게 해 준 힘은 문장 속 단어들 이었다. 언젠가는 [여행의 이유]를 ebook으로라도 다시 읽고 그 단어가 무엇이었는지 찾아보아야지 마음먹었던 적도 있었지만 찾기 위해 일부러 숨겨 둔 보물 찾기의 선물같이 이루기 위해 마음속에 품은 내 꿈이라 치고 그 단어를 아니 모든 단어를 그냥 마음에 담고 있기로 했다. 또다시 시작할 힘을 만들기 위해서 였을까. 진짜 다시 시작하고 싶어졌다. 다시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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