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선포하다
인천 공항에 어둠이 내려앉았고 가을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었다. 한국 냄새가 난다. 공기에서 어둠에서 습하지만 설레는 고향의 냄새. 모든 것이 여전한 한국의 가을이다.
작년 가을 캘리포니아에서 취업 영주권을 취득하고 일을 한 지 1년이 지났다. 모아 두었던 올해의 휴가를 야무지게 계획해 이번엔 좀 멀리 가 보기로 했다. 태생이 여행을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집 근처에서 맛있는거 아무거나 먹고 책이나 영화를 보며 뒹굴 거리는 것을 좋아하는 게으른 습성이 있는 사람이다. 사실 김영하 작가님의 [여행의 이유]도 어떻게 하면 여행을 가지 않을 수 있을까 고심 끝에 변명을 만들어 보려고 읽기 시작 한 책이었다. 하지만 2019년 가을에는 무슨 예감이라도 한 듯 지금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어 보름간의 해외여행을 계획했다. 지난 몇 년간 개인적인 계획으로 미국에 들어오고 있지 않는 남동생을 만나러 유럽으로 갈까 아니면 고국방문을 할까 망설이다가 엄마를 모시고 언니와 나 이렇게 여자들끼리만 서울 여행을 하기로 작심했다.
동생은 직장 때문에 몇 년 전 서울에서 1년 동안 근무한 적이 있었고 아빠도 최근에 세 번이나 홀로 한국에 갔다 들어오셨지만 엄마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산소 이장 때에도 큰 이모, 큰삼촌 장례식도 참석하지 못하셨다. 더 기억을 잃으시기 전에 좋은 추억을 만들어 드리고 싶은 마음에 여행을 계획하게 되었다. 우리는 나와 언니의 본적인 종로 1가에 다다를 수 있고 엄마의 청춘과 꿈의 흔적이 자리한 광화문 언저리에 숙소를 잡아 14박 15일 서울 여행길에 나섰다.
14박 15일은 쏘아놓은 살처럼 빠르게도 지나갔다. 하루 세끼만 먹기가 아쉬울 정도로 늘 배가 부르고 맛난 것이 넘쳐나는 고향이다. 하지만 너무 오래간만의 방문으로 편찮으신 친지 방문과 관공서 업무 등을 마치면 사실상 만남의 시간도 제대로 된 관광도 하기가 참 빠듯한 시간이었다. 한 1년 살이는 해야 그동안 TV에서 보고 입력해 둔 맛집과 볼거리를 모두 섭렵하며 제대로 된 힐링 여행을 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친지들을 돌아가며 만나고 산소 가고 병문안 가는 시간을 제외하니 친구를 만날 수 있는 시간으로 세 여자들에게 할당된 날은 각각 하루 씩 뿐이었다. 엄마는 극적으로 대학 동창 영희, 영자 이모를 만나셔서 10월 8일에 놀고 Sleep over도 하셨다. 특히 영자 이모는 엄마와 한나절 더 있다 가셔서 9일까지 함께 계셔 주시고 나는 10월 9일 한글날 첫 직장동료인 선생님들 그리고 유학시절 함께 동고동락했던 친구들과 번개팅을 했다. 언니는 3일의 마지막인 10월 10일 용산 호랑이들의 모임 산호회 멤버 고교 동창 언니들과 옛 직장동료와의 만남을 오전 오후에 나누어 가졌다. 우리는 이렇게 3일 개인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빠듯한 일정인데 언제 희린이를 만날 수 있을까 조금 걱정이 되었다. 내가 휴가의 휴가를 먹은 10월 9일은 한글날이고 가족이 모두 쉬는 날 이므로 자칫 막 결혼을 하여 시댁 근처에 살고 있는 친구는 시간을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우리들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못할 수도 있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길눈이 먼 나를 위해 희린이가 기꺼이 서울행을 감행했다. 살고 있는 먼 도시에서부터 시외버스를 타고 코리아나 호텔 로비까지 나를 만나러 와 주기로 약속했다. 2019년 10월 7일 이른 아침의 일이다. 언니는 주적주적 비가 내리니 어디 멀리 가지 않고 우선 시내 빨래방에서 빨래를 하고 둘째 이모를 만나기로 했다고 전했고 나는 그 타이밍에 희린이를 만나기로 했다. 떨리는 순간이다. 서로가 20대에 헤어져 15년 만의 재회이다.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한 지인이 한국은 통신이 워낙 발달되어 있어 아무 데서나 길거리에서도 인터넷이 터지니 따로 sim card를 사지 않아도 된다는 정보를 전했다. 거짓말이었다. sim card 없는 보름은 무척 불편했고 우리는 내내 지인을 원망했다. 희린이는 도착하면 코리아나 호텔 로비에서 기다린다고 했다. 하지만 1층 회전문이 있는 안내 데스크가 로비인지 아니면 미니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있는 Front Desk가 로비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정문이 있는 1층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1층에서 희린이는 2층에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한참 동안 기다렸다. 내 방의 번호를 알고 있으니 Front Desk에 문의해 누구 찾아온 사람이 없는지 묻기 위해 2층에 올라갔고 그곳에서 우리는 상봉했다. 분명 그때는 어린 소녀였는데 희린이 키가 160cm가 넘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내 굽이 낮아져서 상대적으로 너무 커버린 희린이가 낯설었지만 미소만큼은 그대로였다. 우리는 얼싸안으며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 쓸법한 인써트를 한 카트 딴 후 광화문 데이트를 나섰다.
동성끼리 팔짱을 끼고 도시를 걷는 내가 낯설었다. 하지만 여기는 미국이 아니므로 누가 본들 개의치 않기로 했다. 우리는 네가 정해라 언니가 정하세요 하다가 결국은 샤부샤부를 하는 집에 들어가 코로 먹는지 입으로 먹는지 모르게 아점을 먹은 후 '테라로사'라는 커피 전문점으로 들어갔다. 이곳이 요새 핫 플레이스라며 희린이가 알려주었다. 나는 시큼한 과테말라산 원두로 만든 따뜻한 커피를 시켰고 우리는 함께 미국보다 더 이국적인 카페 '테라로사'에서 내리는 가을비를 바라보며 통창 앞 카운터에 앉았다.
"언니, 내가 그림을 그릴께 언니가 글을 쓰세요."
2019년 10월 7일 오후. 희린이와 나의 구두 계약은 그렇게 성립되었다.
"그래! 네가 그림을 그리면 내가 멋지게 글을 써서 책을 팔아보자. 내가 부자가 되게 해 줄게. 나만 믿어"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갓 Business School을 졸업한 학생답게 낭만 없는 대답이었지만 '언니, 글을 한번 써 보세요'의 2탄 같은 생각이 들었다. '여태껏 뭐하시나요. 혼자 할 수 없으면 같이해요'라는 말처럼 들렸다. 마음에 품어두고 준비 없이 선언만 했었는데 잊지 않고 내 꿈을 follow up 해 준 희린이의 제안이 무척 고마웠다. 2004년 어느 날 하나님과의 만남을 고백했던 순간 UCSD의 Price Center로 끌고 들어가 릭 워렌 목사님의 책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사주며 읽어보라 나에게 선물했던 그날처럼 희린이는 15년 후 이 날도 나를 데리고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어갔다. 그 곳에서 산문, 에세이를 선물해 주었고 무식한 나를 위해 몇 권의 책을 더 살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리고 이동진의 빨간 책방이라는 책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팟캐스트도 몇개 알려 주었다. 또 daum에 함께 그림 그리고 글 쓰는 비밀 cafe도 만들어 운영해 보자고 제안했다. 나는 cafe이름을 작명 하기를 우리가 매우 오래간만에 바다 건너까지 와서 만났으므로 LongTimeNoSEA라 하고 같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참 제목 따라 인생이 흘러간다고 너무 오래간만에 글을 쓰고 그림을 올리게 된다는 단점이 있지만 어쨌든 계획하고 실행한 최초의 결과물이다.
이 날은 저녁까지 먹고 자고 가겠다는 희린이를 버스에 태워 보냈다. 그리고 그 하루가 15년 만의 아쉬운 만남의 마지막이었고 나는 일정을 다 마치고 미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신혼인데 외박을 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에서 희린이를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준 것이었는데 함께 하룻밤 묵을걸 지금 생각하면 아쉬운 마음이 든다. 늦은 밤인데 바래다주지 못하는 걱정스러운 미안함이 아직까지 마음에 남아있다. 그 후 같은 해 11월 말에 희린이와는 한번 더 미국에서 만났지만 어쩐지 나에게는 2019년 10월 7일의 희린이에게 아쉽고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렇지만 함께 꿈을 선포한 이 날의 감동과 감사가 모든 아쉬움을 살짝 덮어버려서 그나마 다행이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과거를 비교적 생생하게 낯낯이 기억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는데 나의 꿈이 선포된 날을 이렇게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니 내 꿈은 정말 이루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오늘도 꿈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며 그 날을 기억한다. 2019년 10월 가을의 광화문을.
그날처럼 비가 내리는 2022년 플로리다 나의 작은 책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