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brunch
브런치북
50대 신혼부부의 사랑법
09화
남자 친구의 노가다 현장을 가다
by
정민유
May 15. 2022
"나 요즘 노가다 뛰어 괜찮겠어?"
4년 전 우리가 처음 만나서 사귀기로 한 날 나에게 그가 한 말이다. 그가 작가라는 사실만 알았던 난 그 말을 듣는 순간 흠칫했다.
" 어 괜찮아"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즉시 대답했다.
겉으론 괜찮다고 했으나 그 말을 듣고 마음속 깊이 괜찮을 수는 없는 노릇.
'겉으로는 곱게 자란 미소년처럼 보이는 사람이 노가다라니...'
상상도 못 해본 얘기에 사실 걱정이 되었던 건 당연했다.
평생 노가다를 하는 남자를 만날 거라는 생각을 스쳐 지나듯 이라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사람과 사귀기로 했을 때는 그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든 그의 존재를 받아들인 상태였다.
'막노동을 할 수 있는 남자라면 이 험한 세상을 함께 할 수 있겠다'란 생각이 더 컸다.
우린 이미 운명의 강한 이끌림을
거부할 수 없었기에..
'노가다'는 막일이나 막일을 하는 사람을 뜻하고
여기서 막일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하는 노동을 뜻한다.
남자 친구와 사귀게 되면서 건설현장이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되었고 작업복을 입으신 분을 보면 눈길이 한 번 더 가게 되었다.
작가인 남편은 글을 써서 돈을 버는 게 힘드니 처음엔 아는 작가 형인 인테리어 현장에서 일을 도와주다가 본격적으로 막노동 일을 하게 되었단다.
처음 만난 여자에게 쉽게 할 수 없는 말을 솔직 담백하게 하는 그가 오히려 놀라웠다.
남편은 어떤 면에서 굉장히 남성적이고 결단력이 있다.
나중에 그는 괜찮다고 하는 내가 더 놀라웠다고 했다.
모든 예술하는 분들의 딜레마가 아닐까..?
작품 활동의 결과물로 돈을 번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게다가 글은 배고프고 힘든 고통 속에서 더 빛나는 작품이 나올 수 있으니..
그래서 함께 지내게 되었을 때 내가 상담이 끝난 시간이면 그를 데리러 건축 현장으로 가곤 했다.
결혼 생활할 때 타던 외제차를 타고..
뜨거운 햇살이 온통 내리쬐는 여름날
강남 국기원 근처 현장이었다.
보통 4시 반이면 끝나는 시간인데 20분이 지나도록 그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다.
난 기다리다 지쳐 철문이 쳐져있는 현장으로 다가갔다.
슬그머니 철문을 열었다.
그러자 남자 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작업복과 작업모를 입고 삽을 옮기고 있었다.
" 작업복 입고 이렇게 멋진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열심히 일하느라 내가 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듯했다.
난 잠시 지켜보다가 냅다 소리쳤다.
" 끝날 시간 지났어요!!"
그 안에 계시던 인부들은 이게 무슨 일이냐는 듯 날 쳐다봤다.
" 여기 위험해요. 문 여시면 안 돼요"
여자가 겁 없이 문을 열고 소리를 치니 이상하게 봤을 게 당연하다.
남자 친구도 기가 막힌 듯 쳐다보았으나 이내 모르는 척했다. 하지만 입가에 살짝 미소가 스쳤다.
' 내 여자 친구 참 대단한 여자구나' 했을 거다.
다시 차에 와서 기다리니 10분도 안되어 남자 친구의 모습이 나타났다.
하루 종일 온통 땀에 쩌들어 지친 모습이었으나 날 보며 한걸음에 달려왔다.
마치 하교시간에 엄마가 데리러 온 듯 해맑게 웃으며
.
.
" 어떻게 문을 열고 소리칠 생각을 했어?"
" 끝날 시간이 지났는데도 안 끝내니까 화나서 소리 지른 거지 모"
"그래 잘했어"
지금도 남편은 이 에피소드를 지인을 만나면 의기양양하게 한다.
그러면 대부분 사람들은
"정말 두 분이 잘 만났네요. 천생연분인 것 같아요"라고 한다.
하지만 그 당시 남편이 일을 하고 온 날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자면서 끙끙대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었다.
' 이 사람과 무슨 일을 하면 이 막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에겐 커다란 숙제처럼 다가왔다.
사랑하는 사람이 막노동을
하고 와서 앓는 소리를 하는데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
우리가 만나고 2~3개월이 되었을 즈음에 남편을
설득해서 그만두기로 했다.
그리고 3개월 후 함께 심리상담카페를 차리게 되었다.
지금도 남편은 노가다 일을 했던 경험을 자랑스럽게 얘기한다.
"노동이란 숭고한 거야.
내가 일한 만큼의 대가가 꼬박꼬박 나와.
남자로서 해 볼만한 일이야"
나도 남편의 그런 당당함과 은근 남자다움이 있기에 이 글을 쓸 수 있는 거다.
인생의 밑바닥을 쳐 본 경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의 이 호기 어린 행동이 남편에게 그 외롭고 혼자인 것 같은 시간에 대한 선물 같이 느껴졌을 것 같다.
이 세상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우린 참 잘 만났다.
keyword
노가다
건축
현장
Brunch Book
50대 신혼부부의 사랑법
07
또 하나의 인연 고양이 딤섬이
08
내가 이 남자를 사랑하는 이유
09
남자 친구의 노가다 현장을 가다
10
나의 꿈인 심리상담카페를 창업했다
11
50대 신혼부부의 못말리는 사랑법
50대 신혼부부의 사랑법
brunch book
전체 목차 보기 (총 22화)
53
댓글
8
댓글
8
댓글 더보기
브런치에 로그인하고 댓글을 입력해보세요!
정민유
연애 분야 크리에이터
소속
심리상담사
직업
에세이스트
강릉이 좋아 아무 연고도 없는 강릉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강릉에서 노는 언니가 되었습니다. 중년 부부의 강릉살이를 씁니다.
구독자
892
제안하기
구독
이전 08화
내가 이 남자를 사랑하는 이유
나의 꿈인 심리상담카페를 창업했다
다음 1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