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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유 Mar 20. 2022

오미크론 걸린 남편과 제주여행을 갔던 속사정

밋밋한 여행도 여행이다.


내 생일 기념 제주도 여행을 계획했다.

비록 힘든 시기이지만 그럴수록 더 순간을 누리며 살자는데 남편도 같은 의견이라서 바로 비행기 예약부터 했다.

우리의 첫 만남의 모임을 주도했던 페친이 제주 한림에 독채펜션을 운영하고 있다.

한번 가봐야지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마침 페친들을 위한 20% 할인 이벤트를 한다는 거다.

오케이!! 일단 1박은 여기서 묵기로 했다.


그런데 떠나기 전날 남편의 컨디션이 심상치 않았다.

상담을 마치고 집에 오니 남편이 마스크를 쓰고 누워있었다.

"왜 그러고 있어요?"

"나 코로나인 것 같아요"

"헉!! 열나요? 목 아파요? 내가 진단키트 사 올게요"

얼른 진단키트를 사 와서 검사를 해보니 다행히 음성이었다.

그리고 안 가겠다는 남편을 억지로 끌고 병원으로 가서 안 맞겠다는 주사를 맞게 하고 약을 지어와서 먹고 일찍 자게 했다.


"너무 아프면 여행 안 가도 돼요"

"아니에요 갈 수 있어요"

"취소하면 되니까 너무 힘들면 얘기해요"

"괜찮다니까요"

취소하는 게 미안해서 가겠자고 하는 줄 알지만 난 남편 고집을 이길 수 없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니 비가 온다.

비 오는 걸 보니 마음이 확 가라앉는다.

남편은 여전히 아픈 것 같고 어젯밤 꿈자리도 뒤숭숭하다.

이번 여행은 시작부터 별로다.

하지만 가기로 했으니 일단 떠나보자.



제주공항에 도착해서 한림에 있는 숙소로 왔다.

2층 독채펜션이었는데 화이트 톤으로 세련된 인테리어였다.

숙소 이름이 <문득 그 집>이다.

곳곳에 주인장의 세세한 손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두 사람이 묵기에는 너무 컸다.

타운하우스 단지가 컸는데 정말 조용했다.


지인의 강력 추천으로 저녁은 흑돼지구이를 먹으러  갔다. 하지만 기대를 해서인지 별 감동이 없었다.

그리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간 금능해변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날씨는 여전히 흐렸고 남편은 더 아팠다.

방주교회에 잠깐 들렀으나 남편이 힘들어해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애월로 향했다.

점심으로 해물짬뽕을 먹으러 갔으나 휴무였다.

돌아다니다 대충 한 끼 때우고 숙소로 들어왔다.



오션뷰  방으로 들어와서 남편은 아프고 지쳤는지 바로 잠이 들어버렸다.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렇게 밋밋한 여행은 처음이다.

남편이 아프니 마음도 편치 못하고 후회되는 마음도 올라온다.

과연 취소하지 않고 여행을 왔던 게 잘한 걸까?

위약금을 물더라도 집에서 푹 쉬게 했던 게 나았을까?

정답은 없다.


뭐든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난 아직 이 여행의 의미를 찾기가 힘들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그 속에 교훈이 있다고 믿는다.

아마 3년이 되어오는 우리의 관계도 이 여행처럼 되어가는 거 아닐까..? 란 생각도 든다.

남편이 아프기 때문이라고 핑계 대고 싶지만..

익숙함은 설레임과 감동과는 거리가 먼가 보다.

속상하고 받아들이기 싫지만 평생 설레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 받아들이기로 했다.


2년 전  왔던 제주도 여행은 순간순간이 감동이었었다.

결혼하기 전 미리 신혼여행처럼 왔었다.

가보고 싶은 명소들을 미리 다 찾아서 왔고 3박을 각각 서쪽, 남쪽, 동쪽의 숙소에서 묵었다.

산방산, 안덕계곡, 협재해변, 쇠소깍, 섭지코지, 일출봉, 한라산 등 정말 많은 명소들을 관광했다.

방주교회에서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초록색 잔디밭을 환희에 찬 표정으로 달리는 사진도 찍었다.

너무너무 행복한, 빛나는 순간들이었다.

앞으로의 삶이 이렇게 쭈욱 이어질 거라 믿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그때와 비교하면 날씨처럼 무채색 같다.

만약 우리의 사랑도 이런 느낌으로 변해가고 있다면 이번 여행이 주는 의미가 있는 거겠지.

덤덤함과 밋밋함, 익숙함에서 오는 무감동...

이런 것들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이것 또한 삶이고 사랑이라고..


다시 생각해보면 오래된 관계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괜찮고 크게 감동이 없어도 편안하고 여유 있는 그런 거겠지...

아파서 관광을 다니지 못해도 많이 미안해하지 않는 관계.

아마도 남편에게 그런 존재는 나밖에 없지 않을까?




창밖을 보니 여전히 파도가 치고 있다.

아마 한 번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파도는 칠 것이다.

그런 파도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니 내 마음은 심연으로 가라앉는 듯 더 깊고 차분해짐을 느낀다.

옆에서 남편의 코 고는 소리가 정겹게 들린다.

푹 자고 일어날 땐 조금 덜 아프길 기도해본다.



그러나...

오늘 하루의 마지막에 반전이!!

울 숙소 지하에 이런 LP바가 있을 줄이야~~

잠에서 깬 남편이 마지막 밤을 이렇게 보낼 수 없다며 굳이 가자고 해서 음악과 함께 밋밋했던 여행에 색을 입혔다!!


(결국 다녀와서 PCR 검사 결과 양성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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