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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감정의 사진 찍기다.

브런치 작가 100일을 지나면서..

by 정민유


"남는 건 사진밖에 없어"


여행을 하면서 많이 하는 대사다.

정신없이 우르르 몰려다니며 단체 사진 찍는 건 별로이지만

나도 사진 찍고 찍히는 걸 정말 좋아한다.

새로운 장소에 가면 그곳만의 특성이 묻어나는 사진을 찍고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아름다운 풍경, 함께 한 사람, 맛있는 음식을 찍고 실시간으로 SNS에 올리고 '좋아요'가 많으면 기분 좋게 느끼는 관심종자이기도 하다.


그 순간에 경험한 것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누군가에게 공감받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에 더 예쁘게, 더 매력적으로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거겠지.

사실 사진이 없다면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순간은 얼마나 되려나?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많은 추억들이 있다는 게 슬프고 안타깝다.


하지만 사진으로 아름다운 풍경은 찍을 수 있지만 그 풍경을 보며 느꼈던 마음은 찍을 수가 없다.

그건 오로지 글쓰기만으로 가능하다.

맛있어 보이는 음식 사진을 찍지만 실제로 어떤 맛이었는지는 글로 묘사될 때만 알 수 있다.

그래서 오늘 아침 '글쓰기는 감정의 사진 찍기다'란 생각이 떠올랐고 스스로 꽤 괜찮은 것 같아 흡족해했다.




브런치 작가가 되고 글을 쓴 지 100일이 지났다.

그동안 나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경험과 그것에서 파생되는 감정들을 정신없이 써 내려갔다.

지금 쓰지 않으면 혹시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그래서 영영 나한테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이 되어버릴까 봐..

어린 시절 상처 덩어리였던 나의 모습,

많은 내담자들과 상담하며 느꼈던 진한 감동의 순간들,

남편을 만나 경험한 아름답고 소중한 기억들..


걷잡을 수 없이 밀고 올라오는 글감들에 스스로도 놀랐었다.

'이렇게 쓰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었구나'


그 표정이 흡사 사랑에 빠진 스무 살이다.
사로잡힌 자에게 나오는 달뜬 눈빛, 달아나는 감정을 붙드느라 빨라지는 말투, 일상에 침투한 낯선 사건을 낱낱이 풀어내려는 의지가 흘러넘쳤다. <쓰기의 말들> 중에서


요즘 은유 작가님의 <쓰기의 말들>을 읽고 있다.

글쓰기를 배우며 글쓰기와 사랑에 빠진듯한 선배의 모습을 묘사한 구절이다. 글쓰기를 처음 시작하던 때의 내 모습과 오버랩이 되었다.


처음 사랑에 빠지면 거의 100일까지는 황홀함과 설레임에 정신을 못 차리는 시기라고 하지 않는가!!

내가 글쓰기와 그랬다.

매일매일 만나고 싶었고 하루라도 안 만나면 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지인들에게 나의 글을 자랑하고 싶어 입이 간질거렸다.

글쓰기가 얼마나 좋은지 동네 이장처럼 확성기로 외치고 싶었다.



그동안 살면서 경험했던 수많은 고통스럽고 좌절스럽고 기쁘고 환희에 찬 감정들을 글을 통해 사진 찍듯이 기록했다.

내면에 정리되지 않고 저장되어 있던 감정들이 하나하나 고개를 들었고 난 쓰면서 그 감정들을 매만졌다.


글을 쓰면 미처 해결되지 않고 넣어두었던 감정이 선명하게 드러나며 순화됨을 경험했다.

아픈 상처가 더 이상 날 고통스럽게 하지 못했고 기쁨의 감정은 다시 한번 확인되면서 배가 되었다.

날것의 감정이 은은히 숙성되어가는 느낌..


마치 털실로 뜨개질했던 옷을 풀어 꼬불꼬불해진 털실이 주전자를 통과하며 수증기를 통해 매끈하게 펴지는 느낌이랄까?



김용택 시인의 말대로, 길가의 풀 한 포기도 당신으로 연결되는 게 사랑이라면 글 쓰는 자의 신체가 그렇다.
세상 만물의 질서가 글쓰기로 재편집되는 신비체험이다.
<쓰기의 말들> 중에서




맞다!!

이건 정말 신비체험이다.

글쓰기가 가지는 매력은 무한대이다.

글쓰기 전도단이 있다면 가입하고 싶을 정도다.


이 글을 읽는 많은 작가 선배님들께서

"아직 초보니까 그렇지 좀 더 써보고 얘기하세요"라고 하실 것 같다.
아직은 글쓰기의 단맛만 본 상태이니 앞으로 쓴맛, 매운맛, 떫은맛, 짠맛 등을 맛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조심스레 예상해본다.

난 안 쓰는 고통이 쓰는 고통보다 큰 사람이지 않을까?라고.


왜냐하면 연애 초기에 받은 사랑의 기쁨이 큰 사람은 사랑이 깊어지고 당연히 고통스러운 일들이 일어난다고 해도 기뻤던 추억으로 함께 견뎌낼 힘이 있으니까.


오늘도 난 글쓰기에 대한 감정을 사진 찍는 기쁨을 거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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