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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로리나 Jul 14. 2022

프랑스 기차역의 빨강 할머니와 딸

프랑스 여행

  파리에서의 여행 일정을 마치고 남프랑스로 이동하는 날이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리옹역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하고 싶었다. 베르사유 궁전 안에 있는 레스토랑이 아닐까 싶을 만큼 금빛으로 반짝이는 곳에서 파리 여행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아침 식사를 위해 조금 여유 있게 기차역에 도착했다. 내가 예매해둔 기차를 어느 플랫폼에서 탑승해야 하는지 위치 확인을 먼저 했다. 그리고 식당으로 이동했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입이 떡 벌어졌다. 화려함과 우아함의 상징인 파리답게 기차역 안의 식당 수준이 상상 이상이었다. 점심이나 저녁에 와서 코스 요리를 먹으면 비용이 꽤 든다고 하는 곳이다. 하지만 아침 식사를 하러 오면 빵과 과일, 커피 정도의 가벼운 식사가 제공되기 때문에 가격이 크게 부담되지 않아 보였다. 물론 아침 한 끼로 인당 3만원 가량을 들인다는 게 결코 적은 돈은 아니지만, 식당 내부의 근사한 분위기를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은 사라졌다.


  직원들은 테이블 세팅을 하느라 부지런히 손발을 움직이고 있었다. 식당이 오픈한 지 2시간이나 지났을 쯤이었는데도 말이다. 우리보다 먼저 온 서양인 커플도 아직 좌석 안내를 받지 못한 채 서있었다. 5분이 지나도 아무도 기다리는 손님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앞에 서양인 커플이 없었다면, 혹시 동양인이라고 우리를 차별하는 건가 하고 괜한 오해를 할 뻔했다. 앞서 온 손님들까지 안내를 받지 못하는 걸 보니 인종 차별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그냥 그들의 일하는 스타일이었다. 테이블 안내해주는데 이렇게 오래 걸린다면, 식사 주문과 서빙까지는 도대체 얼마나 걸릴까 시간을 계산해봤다. 이곳에서 아침 식사를 하다가는 기차를 놓칠 것 같았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기차표, 숙소 예약, 미리 계획한 여행 일정표. 모든 것을 다 사수해야만 했다. 귀족처럼 우아한 아침 식사를 하는 건 기약 없는 다음 여행으로 미루기로 했다.


Le Train Bleu @ Paris


  레스토랑에서 나와서 급한 마음에 바로 눈앞에 보이는 카페로 들어갔다. 크루아상과 커피를 주문했다. 파리에서는 어디에서 먹든 크루아상 맛이 훌륭하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버터 풍미 가득한 빵 한 조각과 진한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입에 넣는 순간 속상했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 그렇게 파리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마치고 나는 딸과 함께 니스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파리에서 니스까지 가는 데는 6시간이 걸렸다. 아무리 성미 급하고 뭐든 계획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나라는 사람도 6시간 동안은 모든 긴장을 내려놓은 채 차창 밖의 풍경을 즐길 수 있었다.


  파리 도심을 벗어나자마자 펼쳐지는 끝없는 밀밭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푸른 밀밭이 사라지고 나니 지중해 파란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영화제 소식을 접할 때마다 들어봤던 지역, 깐느를 지날 즈음이었다. 부드럽게 풀어졌던 내 심장이 다시 뻣뻣하게 굳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곧 우리가 하차해야 할 장소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지품을 가방에 미리 챙겨 넣고, 캐리어를 짐칸에서 꺼내와서 좌석 옆에 두고 움직이지 않게 꽉 쥐었다. 긴장되는 엄마의 마음을 모르는지 딸아이는 계속 옆에서 종알거렸다. 안내 방송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나는 아이 말에 하나도 귀 기울이지 못했다. 그때 갑자기 아이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엄마, 저 할머니는 빨간색을 좋아하시나 봐.”


  같은 칸에 탑승한 할머니 모습이 저쪽에 보였다. 모자, 투피스, 구두까지 온통 빨간색 착장을 하신 할머니였다. 심지어 여행용 캐리어까지 빨간색이었다. 하얗고 둥글한 얼굴에 눈도 동글, 코도 동글한 할머니는 마치 그림책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그래서 아이한테는 인상 좋은 할머니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반가웠나 보다.


  드디어 니스역에 도착했다. 니스가 남프랑스 코트 다쥐르 지역의 주요 교통지라고 하더니, 기차역 규모도 꽤 큰 편이었다. 플랫폼이 여러 개 있어서 출구로 빠져나가려면 육교를 건너가야 했다. 우리가 내린 플랫폼의 에스컬레이터가 고장나서 사람들이 엘리베이터 앞에 줄지어 서있었다. 다들 니스에 휴양을 즐기러 온 여행객들인지, 커다란 짐을 한두 개씩 들고 있었다. 그 탓에 엘리베이터에 한 번에 탑승할 수 있는 인원이 많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우리 차례가 왔다. 앞에 서있던 빨간색 옷을 입은 할머니가 먼저 엘리베이터 안쪽에 자리 잡으셨다. 여행을 오신 건지 가족을 만나러 오신 건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혼자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육교를 건너 1번 플랫폼 쪽으로 짐을 챙겨 갔다. 그쪽으로 내려가야 출구로 나갈 수 있었다. 1번 방향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려던 순간 뒤를 보니 아이가 없었다. 얘가 엄마를 잘 쫓아오지 않고 어딜 간 거야 하고 속으로 툴툴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아이가 급하다는 듯이 손짓을 하며 소리 질렀다.


  “엄마, 빨강 할머니가 못 내리셨어!”


  엘리베이터 가장 안쪽에 서계시던 할머니가 미처 내리지 못했는데 문이 닫혔나 보다.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실 텐데 뭐가 그렇게 걱정될까 싶었다. 심지어 일면식 한번 없는 사이인데 말이다. 나는 서둘러 숙소에 가고 싶었다. 무거운 짐가방을 내려두고 빨리 지중해 휴양지에서 다음 일정을 즐기고 싶었다. 그런데 아이는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릴 때까지 그 앞을 떠나지 못했다. 문이 열리자 빨강 할머니가 내리실 때까지 버튼을 누르고 서있는 아이를 보니 기특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집 안에서 훈계를 한 엄마였다. 그러나 집 밖에서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람은 내가 아니라 아이였다.


  빨강 할머니가 육교 위로 무사히 올라오신 뒤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내 쪽으로 달려왔다. 아이와 함께 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출구 쪽으로 내려갔다. 출구 밖으로 빠져나가려는데 아이가 또 뒤돌아서서 플랫폼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다. 빨강 할머니가 1번 플랫폼까지 오지 않고, 중간의 다른 플랫폼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신 것이었다. “저쪽으로 내려가면 안 되는데….” 아이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할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할머니는 주변을 두리번거리시더니, 다시 상행 엘스컬레이터를 타고 육교 위로 올라오셨다. 나는 이번에는 말없이 아이 옆에 서서 같이 할머니를 지켜봤다. 출구 쪽 하행 에스컬레이터를 타시는 모습을 보고 나니 이제 마음이 놓이는지 아이가 돌아섰다.


  외동아이라서 부모한테 받을 줄만 알고 남에게 베풀 줄은 모른다고 종종 걱정했다. 나보다 더 순수하고 착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아이를 두고 말이다. 수시로 걱정 공장을 가동하는 엄마는 걱정 인형을 종류별로 하나씩 만들어 끌어안고 살았나 보다. 여행 계획에 따라 칼같이 일정을 지켜나가면서 희열을 느끼느라 여행지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찰나의 순간을 놓칠 뻔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곁에 있는 줄도 모르고 내 시간만 소중히 여기며 서둘러 가려고 했다. SNS에 담을 사진 찍는 일에는 열심이면서 진짜 내 마음에 담아야 할 것들은 놓치고 있었다. 매일 아침 고전을 낭독하며 마음을 맑게 닦아야겠다고 다짐하던 나는 어디에 갔나 싶었다. 고전에서 숱하게 보았던 맹자님의 ‘성선설’이 떠올랐다. 사람은 본디 착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을 믿는다. 그리고 이날 딸의 선한 마음씨를 보고 다시 한번 확신했다. 아이가 아직 세상의 때가 덜 묻은 깨끗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어서 참 다행이다. 그리고 그 마음을 엄마에게 보여줘서 감사하다.


  아이들한테 꽃 선물을 하려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꽃이 프리지어다. 아이들 졸업, 입학 시즌에 이 꽃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다. 프리지어가 풍기는 밝고 싱그러운 이미지 때문이다. 그래서 프리지어의 꽃말은 ‘천진난만’이다. 보통 절화 꽃의 봉오리는 꽃병의 물을 아무리 신선하게 갈아주어도 잘 개화하지 않는다. 그런데 프리지어는 다르다. 가장 끝단에 있는 푸른 꽃봉오리까지 시간이 지나면 활짝 피어나는 경우가 많다. 이 모습은 흡사 아이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화이트 프리지어처럼 아이들이 깨끗하고 고운 마음을 잃지 않고 아름답게 피길 바란다. 멋진 아이들 곁에서 나도 배워야겠다. 내 안의 때를 닦고 깨끗한 마음을 되찾는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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