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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로리나 Dec 23. 2021

엄마는 왜 내 말 안 믿어?

아게라툼(불로화)

  아이의 3학년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노랑이 엄마한테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 연락하고 지내던 사이가 아닌데 전화를 한 것을 보니 뭔가 예감이 불길했다.


  “요즘 분홍이가 다른 아이들한테 저희 노랑이 흉을 보고 다니는 것 같은데, 친구들 사이에서 자기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들이 오고 가니 저희 아이가 신경이 많이 쓰이나 봐요.”


  전화기 넘어 노랑이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여자 아이를 둔 선배맘들이 늘 조언해주던 말이 있다. 친구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는 절대 다른 친구에게 전달해서는 안 된다고 아이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잔소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딸이 수다스러운 성격이다 보니 나는 노파심에 늘 아이한테 말조심하라는 잔소리를 하곤 했다. 그런데 이 녀석이 학교에서 일을 만들고야 말았나 보다 싶어서 순간 짜증이 났다. 게다가 난 그때 새 직장으로 이직한 지 고작 2주 차 밖에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내가 한참 예민해져 있을 시기에 아이가 문제를 일으킨 것 같아서 속상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일단 아이랑 통화를 해보고 다시 연락드리겠다고 하고 노랑이 엄마와의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 바로 아이한테 전화를 걸어서 물어봤더니, 자기는 노랑이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아무래도 저녁에 아이랑 얼굴 보며 대화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전화로는 아이가 거짓말을 할 수도 있지만, 엄마와 눈을 마주 보며 대화하는 순간에는 아이도 솔직하게 털어놓을 테니까. 노랑이 엄마의 전화를 받은 이후로 내 몸은 사무실에 앉아있었지만 머릿속은 온통 집과 아이의 학교를 오가고 있었다.


  집에 와서 저녁밥도 해먹이기 전에 아이를 다그칠 수는 없어서 일단 밥상부터 부랴부랴 차렸다. 나는 애써 괜찮은 척 밥을 먹으려 숟가락을 입 안에 밀어 넣어봤지만,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밥 한 끼 안 먹어도 그만이지 싶어서 난 조용히 아이가 밥을 다 먹기만 기다렸다. 아이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왜 엄마가 밥을 안 먹는지 물었다. 난 조심스럽게 아이한테 말을 꺼냈다.


  “분홍아~ 아까 낮에 엄마랑 전화하면서 한 이야기가 사실이야? 너 진짜 노랑이에 대해서 흉본 적 없어?”


  “응! 난 올해 걔랑 같은 반이 아니어서 만나서 얘기할 일도 없었고, 복도에서 지나가다가 본 게 전부야. 근데 내가 왜 걔 흉을 보고 다녀?”


  “알겠어. 그런데 엄마가 한마디만 더 할게. 네가 친구한테 잘못한 일이 있으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면 해결돼. 그런데 네가 혹시라도 거짓말을 하면 나중에 더 곤란한 상황이 된다고 해도 엄마가 널 제대로 도와줄 수가 없어. 엄마는 네가 잘못을 했어도 네 편이 되어서 널 도와줄 거야. 그러니까 엄마한테는 솔직하게 다 이야기를 해줘야 해.”


  “내가 안 그랬다고 했잖아! 엄마는 왜 내 말 못 믿어? 내가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 줄 알아? 나 오늘 교장선생님한테 칭찬받았어.”


  아이는 가방에서 사탕이 가득 들어있는 선물 봉투를 꺼냈다. 봉투 겉에는 ‘3학년 1반 김분홍 칭찬합니다!’라고 쓰여있었다.


  “이거는 교장선생님이 아무한테나 주는 게 아니야. 학교 칭찬함에 칭찬 사연이 들어온 학생한테만 특별히 주는 거라고! 우리 반에서 나만 이걸 받았다고!”


  아이의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우리 딸이 교장 선생님의 특급 칭찬 선물을 받고 엄마한테 얼마나 자랑하고 싶었을까?’ 아이한테 이렇게 기쁜 일이 있는 날인 줄 모르고 엄마인 나는 칭찬은커녕 아이를 의심하고 있었다. 새 학년에 올라와서 아이한테 가장 기쁜 날이 되었을 날을 내가 다 망쳐버렸다. 그냥 아이 기분만 상하게 한 게 아니라 아이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고야 말았다. 세상 그 누가 뭐라고 해도 엄마는 내 아이를 믿어야 하는데, 내가 아이한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싶었다. 당장 노랑이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아이들 사이에서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라고, 우리 아이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데 중간에 말이 와전된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우리 아이는 노랑이한테 안 좋은 감정이 전혀 없으니, 혹시라도 노랑이가 이 일로 서운해하지 않도록 아이 마음을 잘 달래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고 한동안 나는 비슷한 내용의 전화를 노랑이 엄마한테 몇 번 더 받았다. 심지어 어느 날은 화장실에 ‘이노랑 바보’라고 낙서가 되어 있었는데, 우리 아이가 적었다고 학교에 소문이 났다고 했다. 도대체 왜 이럴까? 아무래도 우리 모녀는 마수에 걸린 것 같았다. 어쩌다가 우리 아이는 자기가 하지도 않은 말과 행동들로 구설수에 오른 것일까? 차라리 나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었으면 나을 텐데, 왜 하필 사랑스러운 내 딸을 둘러싸고 이런 일들이 벌어진 건지. 답답하고 속이 상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집만이 아니었다. 평소 친구들과 사이가 좋았던 노랑이는 갑자기 새 학년이 되자마자 자기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들이 학교에 떠돌아다니니, 노랑이는 노랑이대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자식이 속상해하는 모습을 보니 노랑이 엄마도 당연히 걱정이 되어 많이 예민해있었다. 어떻게든 악마의 장난 같은 이상한 일을 멈추게 해야 했다. 분홍이와 노랑이 모두가 더 이상 상처 받지 않으려면.


  늦은 밤 나는 노랑이 엄마를 만나러 집 앞 카페로 나갔다. 노랑이 엄마는 화가 많이 나보였다. 우리 아이가 안 그랬는데 왜 누명을 씌우냐고 나까지 같이 화를 냈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았다. 아이들 사이의 오해가 어른들 싸움으로 번지지 않으려면 자존심이 상해도 내가 굽히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 아이가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인정할 수는 없었다. 속에서는 뜨거운 용암이 끓어오르는 듯 열불이 났지만 나는 애써 꾹 참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노랑이 어머님, 저희 분홍이는 정말로 그런 이야기들을 하지 않았대요. 아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억지로 사과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희 분홍이가 평소 친구들한테 긍정적인 모습으로 기억되어 있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저희 아이가 부족한 부분이 있다 보니 아이들이 저희 딸을 타깃으로 말을 만들어내고, 그 말이 본의 아니게 노랑이한테 상처를 주게 된 것 같아요. 다 제가 아이를 잘못 키운 탓인가 봅니다. 제가 자식을 더 올바른 아이로 키웠다면 이런 일이 안 생겼을 텐데.. 제가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


  노랑이 엄마는 정중하게 사과하는 내 면전에 대고 화를 내기는 곤란했는지 기분이 조금 가라앉은 듯 보였다. 개운하게 오해가 풀리지는 않았지만 밤새 두 아이 엄마가 대화를 해봤자 일이 해결될 것도 아니어서 우리는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돌아와 남편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혹시라도 자고 있던 아이가 깨서 걱정할까 봐 남편 어깨에 내 입을 틀어막은 채 한참을 울었다. 내가 전생에 무슨 큰 죄를 지은 걸까? 왜 내 아이에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이 자꾸만 벌어지는 걸까? 아이한테 도움이 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너무 싫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급하게 회의에 참석하느라 사무실 자리에 휴대폰을 둔 채 회의를 다녀왔다. 돌아와 보니 부재중 통화가 와있었다. 노랑이 엄마였다. 오늘은 또 무슨 흉흉한 소문이 났길래 이러는 걸까? 나는 그냥 이대로 딸이랑 함께 다른 세상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열어보고 싶지 않았지만 할 수 없이 휴대폰 잠금화면을 풀었다. 노랑이 엄마한테 전화만 온 게 아니라 문자 메시지도 와있었다. 메시지 내용은 ‘분홍이 어머님, 너무 죄송합니다.’로 시작되었다. 첫 문장을 보는 순간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드디어 오해가 풀린 모양이었다.


  노랑이 엄마는 결국 담임 선생님께 도움 요청을 했고, 담임 선생님이 그 반의 관련된 아이들을 한 명씩 따로 불러 면담을 한 결과 그 이야기는 분홍이가 한 말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한다. 어린아이들이 짧은 생각으로 공공의 적을 만들면 친구와의 우정이 더 돈독해질 거라고 착각하고 꾸며낸 이야기들이었다. 알고 보니 분홍이가 피해자인데, 제대로 상황을 모르고 가해자로 몰아서 미안하다는 내용이 메시지에 담겨있었다. 몇 주째 명치끝에 큰 돌덩이가 콱 박혀있는 느낌이었는데, 이 메시지를 보는 순간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당장 집으로 달려가서 우리 분홍이를 꼭 안아주고 싶었다.


  생각해보니 한 달 내내 내 속이 타들어갔던 거에 비해서 우리 딸은 참 의연하고 담담했다. 자기가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하니 억울해하기는 했지만, 나만큼 전전긍긍 걱정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아이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인가 보다. 자신을 믿는 마음으로 힘든 시기를 엄마보다도 더 잘 견뎌낸 아이가 너무도 기특했다. 엄마인 나는 처음부터 내 아이를 믿고 강인하게 지내야 했는데, 어린아이보다도 나약한 내가 참 부끄러웠다.



  골치 아픈 일이 다 해결되고 마음이 편안해진 나는 퇴근길 꽃 한 단을 샀다. ‘신뢰’라는 꽃말을 가진 보라색 아게라툼이 내 눈에 들어왔다. 솜털처럼 부드러운 꽃잎이 손끝을 스치는 느낌이 참 포근하고 좋았다. 내가 처음부터 내 아이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다면, 아이의 마음을 아게라툼 꽃잎처럼 부드럽게 어루만져 줄 수 있었을 텐데..


  ‘엄마가 미안해. 세상 누가 뭐라 해도 엄마는 널 믿어, 사랑하는 내 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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