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티스
엄마가 돌아가신 지 벌써 6년 반이 다 되어간다. 그런데도 우리 엄마는 해마다 크리스마스 즈음이 되면 하늘나라에서 내게 용돈을 보내주신다. 마치 크리스마스 날 아침 트리 밑에 과연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이 있을까 하고 기대하며 트리 앞에 다가가는 어린아이처럼 나는 12월 25일이면 평소 자주 사용하지 않는 은행 계좌를 확인해본다. 올해도 어김없이 산타 엄마는 빨간 양말 속에 용돈 봉투를 넣어 주시 듯 내 계좌로 돈을 보내주셨다.
야무지게 재테크를 잘 못 하던 나는 휴면 계좌 관리에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다 3년 전 겨울날, 갑자기 엄마가 오래전에 만들어주셨던 주택청약 통장이 생각났다. 내가 20대 초반이었을 때 엄마가 이다음에 집 장만할 때 쓰라고 만들어주신 통장이었다. 살다 보니 나는 신축 아파트 청약을 넣어볼 기회는 없었고, 오래된 아파트에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그러다 보니 엄마가 만들어주신 청약통장의 존재를 까맣게 잊은 채 몇 년을 지냈다. 그러다 어느 날 불현듯 나는 그 통장을 떠올리게 됐다. 오랫동안 묵혀뒀던 청약통장에 돈이 잘 들어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한참에 걸쳐 은행 홈페이지 비밀번호를 찾아 힘겹게 로그인을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청약통장에 돈이 잘 보관되어 있던 것은 물론이고, 그 옆에 있던 안 쓰던 일반 계좌에 돈이 꽤 들어있었다. 입금내역 조회를 해보니 청약통장에 대한 이자가 해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일반 계좌에 입금되어 쌓여있었다. 갑자기 공돈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기분이 좋았던 것은 물론이고, 나는 또 다른 이유로 흥분했다. 그 돈은 마치 천국에서 내려온 엄마의 용돈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시기도 어쩜 이렇게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이자가 들어오는지...
엄마의 의도는 나의 집 장만에 도움을 주시려 했던 거지, 이렇게 내가 연말마다 엄마를 추억하라고 만들어주신 통장은 아니었을 텐데... 이유가 어찌 되었든 그 후로 나는 크리스마스만 되면 하늘에 있는 엄마랑 소통하는 기분이 들어 가슴이 마구 설레고 좋다. 올해는 기준금리가 거의 제로에 가까워서 그만큼 이자 금액도 예전에 비해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난 행복하다. 통장에 찍힌 숫자의 크기보다도 엄마의 용돈을 올해도 받았다는 사실 그 자체가 내게는 연말의 기쁨이다. 당장 크리스마스에 만날 수 없어도 엄마가 바다 건너 해외 어디쯤에는 살아계신 것 같은 그런 착각이 들기도 한다.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곧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
우리 엄마는 살아생전에 늘 내게 맛있는 음식을 해주시고, 내 마음에 따뜻한 사랑을 가득 채워주신 분이셨다. 학창 시절 점심시간이면 항상 친구들이 내 도시락 반찬을 부러워할 만큼, 매일 반복되는 도시락 싸는 일에도 엄마는 정성을 듬뿍 담아주시곤 했다. 지금은 비록 엄마가 곁에 안 계시지만, 나는 엄마한테 받은 넘치는 사랑의 힘으로 매일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다. 그런데 우리 엄마는 그거로도 모자라서 돌아가신 이후에도 크리스마스만 되면 내게 용돈을 보내주신다. 신랑 눈치 보지 말고 연말에는 너 갖고 싶은 거 작은 거라도 하나 사라며, 딸한테 비자금을 쥐어주시는 것 같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우리 엄마의 사랑을 생각하니 '영원한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진 스타티스가 떠오른다. 꽃집에는 흰색, 노란색, 핑크색 등 다양한 색깔의 스타티스가 있지만 나는 종종 보라색 스타티스를 사 오곤 한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에 세련된 외모를 갖춘 엄마한테 보라색 옷이 참 잘 어울렸던 기억에 나도 모르게 보라색 꽃에 손길이 가는 것 같다. 얇은 종이처럼 만지면 바스락거리는 느낌이 드는 스타티스 꽃잎은 참 신기하게도 쉽게 바스러질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다. 그래서 이 꽃은 드라이플라워로 자주 쓰이는데, 꽃을 말려서 몇 달을 두고 감상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모습을 오랜 기간 유지한다. 마치 강인한 모성애처럼 말이다. 아이를 키우며 온갖 마음고생을 다 하면서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엄마의 마음이 스타티스 꽃잎과 참 닮았다. 그래서 스타티스의 꽃말은 '영원한 사랑'인가 보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도 나는 엄마의 영원한 사랑을 느끼며 다짐해본다. 내가 엄마한테 받은 커다란 사랑을 내 아이에게도 꼭 전해주어야겠다고... 아이의 마음에 엄마의 사랑을 가득 저축해주어야겠다. 그 사랑이 해가 갈수록 점점 더 크게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앞으로 아이가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될 수 있도록! 아이한테 큰 재산을 물려주지는 못 해도 넘치는 사랑과 그 사랑에 이자까지 붙을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 그리고 아이의 생일날과 크리스마스에는 꼭 선물이 전달될 수 있도록 괜찮은 금융 상품도 알아봐야겠다.
"엄마, 고마워요. 제게 영원한 사랑을 베풀어주셔서... 그리고 영원한 사랑을 제 딸에게 전해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