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리스
지금껏 유명인이나 연예인의 팬으로 살아온 적이 없어서 그런지 가까운 지인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인생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영화나 연극 안에서 본 허구의 인물에게서 크게 감동을 받은 적은 많았다. 하지만 그 작품 속 모습이 배우의 진짜 모습이 아닌데, 남의 인생을 어쩜 그렇게 매끄럽게 잘 연기할 수 있는지 그 노력의 시간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다. 스크린 안에서, 무대 위에서 한치의 실수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려서 박수갈채를 받는 모습. 어쩌면 그들은 남들과 달리 타고난 재능을 선물 받았기 때문에 완벽한 연기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잘 모르겠다. 재능이 먼저인지, 노력이 먼저인지?
요즘 부모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아이가 어릴 때 아이의 재능을 빨리 캐치해서 키워주는 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아이가 어릴 때는 부모가 두 눈에 불을 켜고 아이의 숨은 재능을 찾으려고 구석구석 살핀다. 몇 년을 샅샅이 뒤져봐도 또렷하게 무언가 보이지 않으면 대다수가 같은 결론을 내린다. ‘우리 아이는 그냥 공부 열심히 시켜야겠구나. 특별한 재능이 없으면 공부나 해야지….’ 나 역시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올해 6학년이 된 아이는 요즘 이런 말을 한다.
엄마, 나는 다 글러먹었어!
발레도 글러먹었고,
수학도 글러먹었어.
어릴 땐 이 세상 무엇이든 다 될 수 있다고 자신감 넘치게 말하던 아이였다. 이제는 풀이 죽어 이야기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 씁쓸하다. 혹시 내 머릿속의 생각을 아이가 읽은 건 아닌가 싶어서 미안해지기도 한다. 이제 고작 13살일 뿐인데, 100세 시대에 인생의 십여 프로를 살아온 아이를 두고 나는 뭐가 그렇게 조급해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자식을 잘 키워야겠다는 욕심에서 오는 부담감은 많은 부모들이 안고 살아가는 마음의 짐이다. 그렇지만 부모로서의 부담감을 하루빨리 내려놓고 싶은 욕심 또한 마음속에 같이 품기 마련이다. 아이가 스무 살 성인이 되었을 때 나는 더 이상 자녀 문제로 신경 쓰고 싶지 않은 마음에 자꾸 속전속결을 기대하게 된다.
언뜻 보면 내 인생은 속전속결인 편이었다.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하는 시간이 즐거웠고, 특히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냈을 때의 쾌감이 참 좋았다. 그래서 나는 진로에 대해 크게 고민할 것도 없이 통계학과 진학을 선택했다. 시기를 잘 만난 덕분에 대학 졸업 후 큰 어려움 없이 전공을 살릴 수 있는 회사에 취업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 어깨에는 뽕이 잔뜩 들어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남의 돈 벌기가 어디 쉬우랴? 힘든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나는 왜 이걸 내가 참고 견뎌야 하는지 이유를 찾기 힘들었다. 즐겁고 뿌듯한 기분, 그래서 그 행복감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힘들어도 끈을 놓지 않고 붙잡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할 텐데…. 나에게는 월급 그 이상의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수년을 버티다 결국 번아웃이 오고야 말았다. 대학 진학에만 속전속결이었던 게 아니라, 나의 사회생활 또한 친구들보다 더 빨리 결론을 짓게 되었다.
반면에 같은 일을 해온 남편은 여전히 직업만족도가 높은 편이다. 입사 동기로 만난 남편은 학교 다닐 때 가장 자신 없었던 과목이 수학이라고 한다. 그래서 대학 진학 또한 문과를 선택했다고 한다. 살다 보면 관심 분야가 바뀌기도 하다 보니 남편은 대학시절 데이터 분석에 관심을 갖게 됐고, 그와 관련된 업무를 희망했다. 그러나 사회초년생 시절에는 전공이 다르다는 이유로 남편은 제대로 뜻을 펼칠 수 없었다. 남편은 혼자서 빅데이터 분석 관련 책을 보고, 구글링을 하며 공부했다. 요즘은 유튜브에서 미국 유명 대학의 강의 영상을 찾아보기도 한다. 비록 시작 시점은 나보다 늦었지만 끊임없는 열정과 노력, 그리고 그 과정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현재의 남편을 만들어냈다. 물론 직장 생활이 만만치 않다 보니 스트레스가 심해지는 시기에는 남편도 당연히 직장에 대한 고민을 한다. 하지만 남편은 상황에 따라 직장을 바꿀지언정, 직업은 절대 바꾸지 않을 거라는 마음이 확고하다. 시작 시기보다, 어렸을 때 발견한 재능보다 더 중요한 게 무엇인지 남편과 나의 삶을 돌아보면 알 것 같다.
최근 들어서 뒤늦게 <팬텀 싱어> 방송을 보게 됐다. 서바이벌 방식으로 남성 4인조 크로스오버 팀을 결성하는 프로그램인데, 성악가, 뮤지컬 배우 등 노래 잘하는 남성들이 나와서 귀호강을 시켜줬다. 처음에는 각 성부의 화음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듣기 좋은 음악을 들려주는 게 좋아서 방송을 봤다. 그런데 보다 보니 도전자들의 인생 비하인드 스토리를 중간중간 보여주는 게 흥미로웠다. 어떤 사람은 어려서부터 성악가가 되기 위해 노력했고 해외 유학까지 다녀왔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고3 때 갑자기 진로를 변경해서 성악가가 됐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회사원인데 노래를 하고 싶어서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도전장을 내밀었다고 한다. 시작 시점은 모두 달랐지만 그들은 무대 위에서 하나의 완벽한 하모니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누가 더 잘하고 누가 더 못한다고 감히 평가할 수 없어서 탈락자를 선택해야 할 때마다 심사위원들이 곤혹스러워하는 장면이 보였다. 프로그램 최종 우승 여부와 상관없이 그 방송에 나왔던 많은 도전자들이 현재 가수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심지어 음악 비전공자인 회사원 역시 지금은 대중의 사랑을 받는 크로스오버 가수가 됐다.
<팬텀 싱어>의 가수들을 보니 불현듯 작년 수능일에 샀던 꽃, 아이리스가 떠올랐다. 아직 피지 않은 꽃봉오리 10개를 화병에 꽂아두고 잠들었는데,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나는 탄성을 질렀다. 전날 꽉 다물어져 있던 꽃들이 저마다 다 다른 속도로 꽃잎을 펼치고 있었다.
같은 종류의 꽃을 똑같은 환경에 두었지만 개화 속도는 제각각이었다. 마침 수능날 아침에 이 광경을 보고 나는 기도하고 다짐했다. 이날 수능을 본 친구들의 마음이 모두 한결같은 수는 없었을 것이다. 누구는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을 것이고, 누구는 속상한 마음에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하지만 꽃들의 만개 시점이 모두 다른 것처럼,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이들이 꼭 알았으면 좋겠다. 남의 자식을 보면서 이런 입바른 소리를 할 게 아니라, 나 자신도 이 사실을 꼭 알았으면 좋겠다. 속전속결보다는 천천히 무르익어가는게 오히려 성숙함을 더해갈 수 있고 더 단단해질 수 있는 길이라는 걸….
아이리스의 꽃말은 ‘기쁜 소식’이다. 조급함을 버리고 아이를 믿고 기다리면 내 아이가 전해주는 기쁜 소식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꽃을 보며 또 한 번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