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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로리나 Feb 17. 2022

채송화보다 더 예쁜 여의사가 건넨 위로

양귀비꽃

  나는 의학 드라마를 보지 않는다. 종합 병원의 병실 장면을 보면 엄마가 병상에서 고생하시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삐익- 소리와 함께 바이탈 사인이 꺼지는 장면이 나오면 엄마가 우리 곁을 떠나가던 순간에 내 심장이 함께 멎어버릴 거 같았던 그 느낌이 생각난다. 그래서 <슬기로운 의사 생활> 드라마가 아무리 인기라고 해도 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흥행 몰이를 하는 드라마가 방영되는 시기 동안에는 그 드라마를 안 보면 점심시간에 직장 동료들과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다. 매일 업무 부담에 짓눌려 지내는 직장인들에게 인기 드라마 리뷰 타임은 사무실 속에서 잠시 일탈을 꿈꿀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 번도 <슬기로운 의사 생활>을 본 적이 없지만 동료들의 이야기만으로 드라마의 주요 내용을 다 파악할 수 있었다. 매 회차마다 드라마 리뷰를 하고 나면 동료들의 마무리 발언은 늘 한결같았다.


  “세상에 그런 의사가 어디 있어? 드라마니까 가능한 이야기지!”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가슴으로 환자들에게 희망을 전해주고 위로를 건네주는 의사들의 이야기는 현실 속에서 쉽게 만나보기 힘들다는 게 대다수 사람들의 의견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슬기로운 의사 생활>의 여의사 채송화 역할을 맡았던 전미도 배우만 보면 엄마의 담당의가 떠오른다.


  2년이라는 투병 기간 동안 지칠 대로 지친 탓이었는지, 엄마는 식사를 제대로 하시지 않고 종일 침대에만 누워계셨다. 약을 드셔야 하니 그전에 죽이라도 드시게끔 하면 겨우겨우 몇 숟가락을 억지로 떠 넣기만 하셨다. 점점 기력을 잃어가던 엄마는 어느 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침대 위에서 가파른 호흡을 내쉬고 계셨다. 그날 구급차를 타고 중환자실을 찾은 이후로 두어 달 동안 같은 상황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지만 엄마는 위기를 잘 견뎌내시고 병원에서 며칠 치료를 받고 나면 집으로 돌아오시곤 했다. 집에 와서도 엄마는 침대에 누워계시는 시간이 전부였지만 그렇게라도 곁에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참 좋았다. 어떤 날은 산소 호흡기를 끼고 누워있는 엄마 옆에 나는 나란히 누워서 단잠을 실컷 자기도 했다. 앙상하게 뼈밖에 남지 않은 몸이어도 엄마 곁은 늘 포근하고 따뜻했다. 그런데 이 시간이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엄마는 가정용 산소호흡기 만으로는 숨을 쉬기 힘들어서 병원 신세를 다시 져야만 했다.


  아침에 출근해서 아직 사무실 내 자리의 피씨 전원 버튼도 누르기 전이었다. 갑자기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아빠의 전화였다. 이른 아침부터 전화를 하신 게 마음이 불안했다. 아빠는 자세한 말씀은 안 하셨지만, 오늘은 예감이 좋지 않으니 병원에 같이 있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병원에 도착해보니 이미 담당의가 병실에 다녀간 이후였다. 담당의는 엄마가 그날 밤을 넘기기 힘들 것 같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갑자기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이 시렸다. 어떻게 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가 되는 거지? 마음의 준비 전문가가 있으면 당장 연락해서 물어보고 싶었다. 병실 밖 복도 구석에 서서 창밖만 하염없이 쳐다보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난 주저앉아버렸다.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두 눈에서 줄줄 흐르는 눈물은 멈추질 않았다. 그때 갑자기 누가 내 옆에 다가와 같이 쪼그려 앉았다. 엄마의 담당의사였다.


  “보호자님 그동안  많이 쓰셨어요. 할 수 있는 건 다 하셨잖아요. 보호자님 마음을 가장  아는 사람은 환자분이실 거예요.  마음  아실 거니까 너무 아파하지 마세요.”


  마음의 준비란 이런 것일까? 아프고 속상한 내 마음은 이미 엄마도 다 아시니까, 아파하는 일 대신 꼭 하고 싶은 마지막 인사를 하는 게 도리이겠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엄마에게 내가 꼭 해 드려야 할 일이 있다는 게 떠올랐다. 해외 출장 중이던 친정오빠가 아침에 아빠 전화를 받고 공항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가장 빠른 귀국 편 비행기를 검색해봐도 그날 밤 출발이라고 했다. 오빠는 다음날이나 돼야 병원에 도착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담당의한테 상황을 이야기하고 부탁했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아들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최소한 아들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했다. 힘들지만 최선을 다 해보겠다고 하던 그 의사는 수액 봉지를 들고 병실로 찾아왔다. 약물의 힘으로 심장 뛰는 시간을 조금 연장해볼 수는 있지만, 몇 시간이나 버틸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최선을 다 하겠다는 그 말이 무색하지 않게 담당의는 밤새 우리 병실을 수시로 들락거리며 수액 투여량을 조절했다. 다른 때 같으면 간호사들만 밤사이 병실에 와서 환자의 상태를 체크했는데, 그날 밤은 달랐다. 담당의는 그날 밤 엄마 곁을 오가며 구멍 난 내 가슴까지 함께 치료해주었다. 다행히 엄마는 약한 호흡이라도 천천히 내쉬며 하룻밤을 버텼다.


  아침에 인천 공항에 도착한 오빠는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내게 전화했다. 엄마가 아직 숨 쉬고 계시다는 말에 오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엄마의 심박동이 점점 약해지고 있어서 오빠가 입국 수속을 마치고 병원까지 오는 동안 엄마가 버티기는 힘들 것 같았다. 이 말을 하자 오빠는 몹시도 당황했다.


  “지금부터 내가 엄마 귀에 이어폰 꽂아줄게. 엄마랑 오빠의 둘만의 시간이니까 편하게 오빠가 하고 싶은 이야기해.”


  엄마는 이미 의식을 잃은 지 한참 됐지만 나는 엄마 귀에 이어폰을 꽂아드렸다. 의식 불명의 상태에서도 청각 세포는 반응을 한다는 해외 연구 사례를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다. 엄마도 아들의 목소리를 또렷하게 들으신 것 같다. 오빠와의 통화를 끝마치자마자 엄마의 몸에 연결되어 있던 바이탈 사인은 삐익하고 요란하게 소리를 냈다. 담당 의사는 엄마가 자정을 넘기기 힘들 것 같다고 했지만 아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까지 미약하게나마 숨을 이어온 엄마의 마지막 노력. 죽음의 문턱 앞에서도 모성애의 위력을 보여주신 엄마의 모습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의 부탁을 외면하지 않고 같이 애써준 담당의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의사로서의 책임감과 따뜻한 마음을 가진 선한 담당의사를 만난 건 우리 엄마의 마지막 인복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빠의 옆자리가 유난히 허전해 보이는 날이 있다. 바로 어버이날 즈음해서 가족 식사를 하는 날이다. 해가 거듭해도  빈자리의 크기는 줄어들지 않는다. 지난봄에도 우리는 예년처럼 근교 경치 좋은 한식집을 찾아가 함께 밥을 먹었다.  먹고 나면  강가에서 연날리기를 하고 돌아가야 한다는 손녀의 말에 할아버지는 흔쾌히 응하셨다.  뜻대로 날리지 않는 연을 들고 애쓰고 있는 손녀가 안쓰러운지 할아버지는 손녀 옆에  붙어 서서 연날리기 코칭을 해주셨다. 할아버지와 손녀의 모습 너머로 꽃밭이 보였다. 들판의 빨간 양귀비꽃이 바람에 한들거리고 있었다. 비단처럼 얇고 고운 꽃잎이 바람에 날리며  마음을 살살 어루만져주는  같았다. 마치 엄마가 세상을 떠나던   곁에서 잔잔한 위로를 건네주던 여의사의 모습처럼 말이. 양귀비꽃의 위로의 손길이 친정아빠의 마음에도 닿았으면 좋겠다. 아빠 가슴속의 허전함을 채워줄 수는 없겠지만, 쓰라리고 아픈 생채기가 아물게  다스려주었으면 한다. 엄마는 이제 하늘나라에서 아픈데 없이  지내고 계시다고 누가 소식을 전해줄  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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