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넌큘러스
전 세계를 엄습한 바이러스의 공격으로 모두가 불안한 마음으로 2020년 새해를 시작했다. 그 당시 맞벌이 부부였던 우리의 가장 큰 고민은 아이 돌봄 문제였다. 다행히 근처에 친정아빠가 살고 계셔서 일단 아빠한테 아이 돌봄을 급하게 요청드렸다. 아침저녁으로 붐비는 지하철을 타고 가는 시간 동안 혹시라도 옆 사람과 몸이 부딪히면 바이러스가 내 옷에 옮겨 붙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출퇴근을 했다. 각종 언론에서 질병의학 전문가들의 의견이 나올 때마다 마음은 한없이 무거워지기만 했다. 뾰족한 대책은 나오지 않았다. 그해 겨울 동안 회사와 집만 시계추처럼 오가며 주중을 보내고, 주말이면 집 안에 콕 틀어박혀 있었다. 그렇게 석 달이 흘렀다.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상황에 경기는 점점 움츠러들고 회사는 이 위기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대응 전략을 내놓으라며 매일 나를 닦달했다. 새 학기가 되었지만 아이가 등교를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때만 해도 코로나 상황 초기여서 학교는 온라인 수업할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엄마가 집에 함께 있는 아이들은 그 시간에 가정 학습을 체계적으로 하며 알찬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텐데, 우리 아이만 방치되어 있는 건 아닐까? 저렇게 외롭게 집에 있다가 아이 마음에 병이 나지는 않을까? 계속 연이어지는 답답한 상황에 걱정은 더 커져갔다. 하지만 퇴근 이후에 아이의 부족한 학습을 보충해주기에는 내 체력이 허락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면 아이 저녁밥을 해먹이고, 다음날 아침과 점심 두 끼를 할아버지와 아이가 먹을 수 있도록 또 식재료를 다듬고 식사 준비를 해두고 나면 내 몸은 녹초가 됐다. 할아버지의 고충도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엄마인 나도 매일 아이를 돌보다 보면 지치곤 하는데, 아무리 손녀를 끔찍이 사랑하는 할아버지라지만 매일 집콕하며 온종일 아이와 보내는 일은 쉽지 않다. 나는 당장 워킹맘 상황을 끝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루에 열두 번도 더 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길마다 지나가던 마트 앞을 걸어가는데 싱그러운 꽃향기가 내 코를 간질였다.
'어, 나 지금 꽃시장 온 기분인데? 뭐지?'
고개를 돌려보니 마트 입구에는 알록달록 싱그러운 꽃들이 담긴 플라스틱 통이 줄지어 서 있었다. 너무 반가운 마음에 나는 육성으로 소리 내서 감탄하고야 말았다. 김장날 절인 배추처럼 축 쳐진 채 출근하던 찌든 직장인이 출근길에 환하게 미소 지으며 행복의 감탄사를 내뱉을 수 있다니… 몇 년 전 꽃이 내게 마법처럼 다가온 것처럼 이번에도 꽃은 어두운 동굴 안에서 환한 등불을 들고 내게 다가와 주는 것 같았다. 흥분을 잠시 가라앉히고 일단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자리에 앉았다. 마음은 이미 놀이공원의 오색 풍선처럼 붕붕 떠다녔지만, 난 회사의 직원으로서 오늘 내 할 몫은 해야만 했다. 나는 피씨를 켜고 오전 근무를 말끔히 마무리한 뒤 점심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날따라 왜 그리 오전 시간이 길게 느껴지던지…
점심시간에 꽃구경을 하러 다시 마트 앞으로 갔다. 마트 꽃 코너 앞에는 '화훼 농가 살리기'라는 슬로건이 붙어 있었다. 그동안 내 생활이 답답하고 힘들다고 주변까지 걱정할 여력이 없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나만 힘든 게 아니었다. 연말 연초 각종 행사, 아이들 졸업식과 입학식이 줄줄이 다 취소되었으니 꽃농가에서는 들어오는 수입은 없고 재배한 꽃을 처분하느라 눈물을 흘렸을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예쁜 꽃들이 쓸모없이 폐기 처분되었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팠다. 자식 같은 마음으로 꽃을 키웠을 농부님들 마음은 오죽했을까?
평소라면 상상할 수 없는 저렴한 가격의 꽃들이 마트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쁜 꽃을 출퇴근 길에 구경할 수 있는 것만 해도 내게는 행복인데, 커피 한잔 값에 꽃 한 단을 사들고 집에 갈 수 있다니. 나는 횡재한 기분이었다. 이날 유난히 내 시선을 끌던 꽃은 여리디 여린 새하얀 꽃잎이 겹겹이 쌓인 라넌큘러스였다. 바이러스와 함께 온 세상이 차갑게 얼어붙은 시기에 무결점 순수한 매력을 한껏 자랑하고 있는 라넌큘러스 꽃송이를 보고 어찌 반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꽃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니 집안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설거지를 끝내고 돌아서는 순간 식탁 위의 꽃과 눈이 마주치면 잠깐이지만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주말이면 우리 집 홈카페 분위기가 한층 근사해진 것 같아 특별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꽃 한단이 이렇게 주변 공기를 바꿔놓다니... 감사한 마음으로 꽃을 한참을 바라봤다. 갑자기 내 머릿속에는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이 펼쳐졌다. 온통 시커먼 재로 뒤덮인 죽은 땅에 갑자기 하얀 꽃 잎 하나가 바람에 흩날리는 장면. 그 꽃잎이 스쳐 지나간 자리마다 재가 겆히고 깨끗한 세상이 찾아오면 얼마나 좋을까? 혼자 말도 안 되는 허튼 상상을 하다가 이내 생각을 바꿨다.
'온 세상을 다 아름답게 탈바꿈해줄 만큼 엄청난 마력을 지닌 꽃잎은 아니지만, 네가 내 마음만큼은 새하얗고 포근하게 바꿔주었어. 고마워! 내게 와줘서.'
그날 이후 나는 종종 퇴근길에 꽃을 사들고 집에 왔다. 나는 SNS에 '화훼농가살리기'라는 해시태그를 달아 피드를 올리며, 마치 내가 화훼 농가를 위해 봉사하는 마음으로 꽃을 사는 것처럼 착한 소비자 행색을 했다. 하지만 실상은 화훼 농가가 나를 살리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에 들어선 순간, 그저 막막하고 답답하기만 했던 내게 다가와 손을 잡아준 건 꽃이었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그냥 존재 자체만으로 위로가 되는 꽃은 차가워진 내 마음의 온도를 올려주는 패치 같았다.
이 힘든 시기를 우리는 각자만의 노하우로 잘 견뎌내고 있다. 2020년에는 처음 찾아온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불청객 때문에 많이 당황했지만, 1년을 잘 버티며 적응했다. 좀 살만해졌나 싶었는데 2021년에는 델타 바이러스가 난동을 피웠다. 그리고 2022년 올해는 오미크론이라는 변이 바이러스가 또 횡포를 부리고 있다. 이제 맞을 만큼 맞았고, 그 사이 맷집도 꽤나 생긴 것 같다. 그러니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자고 다짐해 본다.
나는 오늘도 마음 백신 접종을 위해 꽃집을 찾는다. 이 추운 계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실크 드레스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듯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라넌큘러스. 이 꽃은 연약할 것 같지만 생각보다 강하다. 수십 장의 꽃잎이 겹겹이 모여 꽃 내부를 감싸고 있다. 내 마음도 그렇게 단단히 감싸 보자. 올 한 해 몰아칠 강한 비바람에 비록 꽃잎 한두 장이 떨어져도 괜찮다. 그래도 내게는 아직 수십 장의 고운 꽃잎이 남아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