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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로리나 Feb 10. 2022

친구를 도둑으로 만들다니…

튤립

  겨울과 봄 사이, 이맘때 꽃집에 가면 색색깔 튤립을 만나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늘 나의 시선을 붙잡는 꽃은 하얀색 튤립이다. 새하얀 튤립 한송이를 건네면 상대의 마음속에 얼룩 졌던 나에 대한 미움이 깨끗하게 지워질 거 같은 기분이 든다. 곧게 뻗은 줄기 끝에 달린 하얀 꽃봉오리가 마치 백색 페인트가 흠뻑 묻은 붓 같다고나 할까? 그래서 나는 흰색 튤립만 보면 초등학교 4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가 떠오른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흑역사로 기억될 뻔했던 나의 잘못에 흰색 붓칠을 예쁘게 해 준 마음씨 넓은 아이가 우리 반에 있었다.


  초등학교 때 가장 좋아했던 시간은 체육시간이었다. 운동장에서 승부욕을 불태우며 발야구나 피구를 할 수 있는 시간은 늘 즐거웠다. 그리고 가끔씩 교실에 남아 우리 반 지킴이가 되는 일도 흥미로웠다. 담임 선생님은 당번인 학생 두 명에게는 체육 시간 동안 교실에 남아서 우리 반 아이들의 물품을 지키도록 했다. 별거 아닌 일 같으면서도 선생님의 특명을 받아 보안 요원이 되는 일은 스페셜리스트가 되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그날은 나와 효경이가 교실에 남아있게 됐다. 아이들이 모두 운동장으로 나가고 텅 빈 교실에 친구와 단둘이 있으니 방금 전까지 앉아있던 교실이 색다르게 느껴졌다. 더 넓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조용한 교실 분위기가 어색하기도 했다. 갑자기 낯선 공간에 온 것 같은 느낌이 효경이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일까? 효경이는 나한테 엉뚱한 제안을 했다.


  “우리 선생님 책상 서랍 열어보지 않을래?”

   

  “그걸 왜?”


  “그냥, 궁금하잖아.”


  효경이의 갑작스러운 말에 난 당황했다. 선생님의 서랍에는 뭐가 들어있을까 사실 궁금하기도 했다. 그 안에는 우리 반 아이들의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선생님의 물건에 허락 없이 손을 댄다고 생각하니 불편한 마음이 들어 나는 이내 생각을 고쳤다. 내가 호응하지 않으니 친구도 선생님 책상에서 멀리 떨어졌다. 우리는 그냥 의자에 앉아서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체육시간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이 하나둘씩 교실로 돌아왔다. 우리의 보안 요원 미션은 별거 없이 끝났다. 그런데 그 후로 며칠 뒤 문제가 발생하고야 말았다. 아니, 내가 문제를 일으키고야 말았다.


   당시 우리는  달에  번씩 저축을 했다. 학교에서 만들어준 우체국 통장과 용돈을 담임 선생님께 드리면, 선생님이 그걸 모아서 입금해주셨다. 며칠 후면 보라색 잉크로 저축한 날짜와 금액이   더해진 통장을 돌려받을  있었다. 그런데 그달에는 선생님이 통장을 빨리 돌려주시지 않으셨다. 대신 선생님은 어두운 얼굴을   교탁 앞에 서셨다. 통장의 돈이 일부 사라진 거였다. 선생님은 우리 모두에게 눈을 감고, 돈을 가져간 사람은 조용히 손만 들으라고 하셨다.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용서해  테니 걱정하지 말고 손을 들으라고 하셨다. 나는 눈을  감고 있어서 누가 손을 들었는지,  명도 손을  들었는지 몰랐다. 범인이 누구인지 너무 궁금했지만  순간 눈을 뜨면 선생님께 크게 야단을 맞을  뻔해서 눈을   없었다. 아마 다른 친구들의 마음도 나랑 비슷했을 것이다.


  그날 하굣길, 연희랑 함께 나는 교문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연희가 내게 물었다.


  “너는 그 돈을 누가 훔쳤을 거 같아?”


  “음… 내 생각에는 효경이 일 것 같아. 나 며칠 전에 효경이랑 같이 체육시간에 당번이었잖아. 그때 걔가 갑자기 선생님 서랍 열어보자고 나한테 그랬거든.”


  “그래서? 열어봤어?”


  “아니! 그걸 왜 열어봐.”


  “근데 왜 효경이가 범인이야?”


  “선생님 서랍 열어보자고 한 게 이상해서. 걔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고.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한 얘기니까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나는 별생각 없이 연희한테 내 짐작을 이야기하고는 돌아서서 집으로 왔다. 이때만 해도 몰랐다. 이 한 마디가 불씨가 되어 엄청나게 큰 불을 낼 거라고는…. 심지어 그 불은 몇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미 온 동네에 다 번졌다. 저녁때 갑자기 전화기 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는 엄마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통화를 끝내자마자 엄마는 나를 불러 낮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셨다. 내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전화로 해결될 상황이 아니라 생각했는지 효경이와 연희 그리고 두 친구의 부모님까지 모두 우리 집에 모이게 했다. 늦은 밤 우리 집에서 삼자대면이 시작된 것이었다. 친구들과 엄마들이 우리 집까지 오길 기다리는 동안 내 심장은 몹시 쿵쾅거렸다. 나는 내 눈으로 친구가 도둑질한 걸 본 게 아닌데, 심지어 정확한 증거도 없는데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 너무 후회스러웠다. 그렇지만 한번 내뱉은 말을 도로 주워 담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떻게든 효경이에게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해야만 했다.


  다행히 우리 셋 모두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서 거짓 없이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고 오해를 풀었다. 연희가 나한테 들은 이야기를 다른 친구한테 전달하고, 그 말이 동네에 퍼지면서 와전된 것이었다. ‘효경이가 돈을 훔쳤을 수도 있을 거 같아.’라는 말이 ‘효경이가 돈을 훔쳤대!’라고 소문이 나는 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뻔한 시나리오를 나는 미리 떠올리지 못하고 입방정을 떨었던 것이었다. 효경이랑 효경이 어머님께 너무 죄송했다. 엄한 소문이 나 당황스럽게 한 게 미안했고, 그보다도 친구를 의심했다는 사실에 더 미안했다. 나는 효경이에게 사과했다. 그냥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쉽게 풀어지지 않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진심을 담아 사과하는 것 말고는 별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날 밤 나는 밤늦도록 잠들 수 없었다. 다음날 학교에 가서 효경이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걱정됐다. 아무리 내가 미안하다고 했지만, 동네에 이미 쫙 퍼진 소문 때문에 한동안은 효경이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았다.


  다음날 등교하자마자 나는 엄마의 조언대로 담임 선생님께 전날 있었던 일을 말씀드렸다. 아이들 사이의 소문을 잠재워줄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담임 선생님의 공식 발언일  같았다. 이야기를  들으신 선생님은 나와 효경이, 연희를 모두 교실 앞에 나오라 하신  서로 사과하고 화해하라고 하셨다. 우리는 전날 밤처럼 다시 한번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화해했다. 다행히 소문을 바로잡 일도 초스피드로 이루어졌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효경이의 마음의 상처가 신경 쓰였다. 나는 뒤끝이 있는 성격이라서, 한번 나한테 상처  사람한테는 뾰족한 마음이  오래가는 편이다. 그래서 한동안은 효경이와의 관계가 껄끄러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효경이는 내가 사과한 그날부터 바로 웃으면서 내게 인사했다. 어쩜 그렇게 넓고 깊은 마음을 가졌는지, 마흔이 넘은 지금  나이에 돌이켜봐도  친구의 너른 마음씨는  멋지다.


  그 당시 친구가 나를 쉽게 용서해주지 않았으면, 그 사건이 너무 부끄러워서 지우고 싶은 기억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멋진 친구 덕분에 나는 인생의 큰 교훈을 얻은 소중한 날로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 말은 함부로 내뱉으면 안 된다는 것. 특히나 그 말이 다른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라면 더더욱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리고 행여 누가 내게 상처를 줬다 해도, 오래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용서할 줄 아는 아량을 베풀 줄 알아야 한다는 것. 이날 깨달은 삶의 지혜는 내가 초등학생 딸아이한테도 늘 강조하는 부분이다. 엄마가 어리석은 판단과 경솔한 언행으로 큰 실수를 저질렀지만, 너른 마음씨를 가진 친구 덕분에 용서받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는 에피소드가 아이한테는 그 어떤 동화책보다도 강렬하게 기억되나 보다. 지금도 아이는 종종 나한테 이날의 이야기를 꺼내곤 한다. 우리 모녀에게 귀한 가르침을 준 친구 효경이, 그 친구의 마음은 30년의 세월 동안 더 깊어지고 넓어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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